리메이크의 시대, 창작보다 '재탕' 많았던 2015년

[이현지의 컬티즘<75>] 2015년 출판·영화·음반계 리메이크 열풍…창조 없는 시대 오지 않길

머니투데이 스타일M 이현지 칼럼니스트,   |  2015.12.31 09:01  |  조회 4085
컬티즘(cultism). 문화(culture)+주의(ism)의 조어. 고급문화부터 B급문화까지 보고 듣고 맛보고 즐겨본 모든 것들에 대한 자의적 리뷰이자 사소한 의견.
/사진=뉴스1
/사진=뉴스1
책을 좋아한다.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책 자체를 좋아한다. 어린 시절, 동네 서점에 새 문제집이 들어오면 직원 언니가 따로 전화를 해 줄 정도였다. 그렇게 구입한 문제집을 한 장씩이라도 풀었다면 지금쯤 내 인생이 달라졌을텐데. 그 책들은 모두 졸업과 함께 후배들의 손에 전달됐다. 후학 양성에 힘쓴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하지만, 가족들은 지금도 당시 몇 박스의 새 문제집을 학교로 날랐던 것을 이야기하며 놀린다.

얼마 전 오랜만에 서점에 갔다. '사고 싶은 책이 너무 많으면 어쩌지'라고 걱정하며 들어갔는데 결국 한 권도 사지 못하고 나왔다. 신선하고 깊이 있는 문학 작품을 사고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와 있는 책들은 대부분 새롭지 않은 실용서나 아프니까 청춘이라거나 나는 왜 외롭냐는 식의 심리학 에세이 혹은 여행서적들 뿐이다. '문학' 베스트셀러도 마찬가지다. 최근 개봉한 영화를 소설화한 작품이나 영화의 원작 소설만이 차지하고 있었다.

출판업계에서는 2015년 출판계를 '한국 문학 실종의 해'라고 평하고 있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신작이 나오지 않았고, 김훈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를 제외하면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한국 문학 작품을 찾아볼 수 없다. 올해 새로 발견된 작가는 '한국이 싫어서' '댓글부대' 등 화제작을 발표한 소설가 장강명이 거의 유일했다. 외국 문학도 마찬가지다. 유명 작가들의 신작도 없고, 새롭게 떠오르는 신인 작가도 없고 심지어 노벨 수상작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영화 '러브액츄얼리' '러브레터' 포스터/사진=조이앤컨텐츠그룹
영화 '러브액츄얼리' '러브레터' 포스터/사진=조이앤컨텐츠그룹
영화 쪽도 마찬가지다. 어째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등장하던 그 흔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하나 없다. 그나마 눈에 띄는 건 재개봉 영화 '러브 액츄얼리' 뿐이다. 생각해보면 올해는 '미션 임파서블' '스타워즈' '쥬라기월드' '매드맥스' 등 대작 시리즈물의 후속편이나 '이터널 선샤인' '러브액츄얼리' '렛미인' '러브레터' 등 재개봉 영화가 참 많았다. 대부분 원작의 힘을 얻어 흥행에는 꽤 성공했지만 결국 원작의 변주에 그쳤다. 신작으로 발표된 영화 중에 볼만하고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렸던 작품들이 몇 개 있지만, 후속편을 기대할 만큼 대작은 없었다.

음반시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몇 년 전부터 대중문화의 흐름을 타기 시작한 복고가 지난 1월 방송된 MBC '무한도전'의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로 흥행 가속도를 올리면서 본격적인 리메이크의 한 해를 맞이했다. 많은 가수들이 너도나도 예전 명곡의 리메이크 앨범을 발표했고, 신곡들은 쉽게 잊혀졌다. 물론 유행은 돌고 도는 것이고, 복고는 엄연히 대중문화의 한 축이다. 하지만 리메이크가 창작 넘어서거나 검증된 작품을 활용한 안전한 시도로 전락해버린다면 문제가 있다.

/사진=MBC
/사진=MBC
생각해보면 올해 대중문화계 전반에 창작보다는 기존 콘텐츠의 재탕, 삼탕이 난무했던 한해가 아니었나 싶다. 어쩌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쉽게 잊혀지는 시대,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내는데 필요한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닐까. 더 이상 전설도, 클래식도, 대단한 작품도 그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자도 없는 시대가 되는 것이 아닌지 걱정된다.

순간순간 눈과 귀를 사로잡지만 휘발성이 강해 금세 기억에서 잊혀지는 콘텐츠들이 아닌 오랫동안 숙성시켜 전 세계적으로, 전 세대적으로 사랑받는 작품이 어디에선가는 만들어지고 있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대중의 변덕스러운 관심에 휘둘리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창작자가 있다고 믿고 싶다. 재주 많은 붉은 원숭이의 해 2016년에는 이러한 작품과 창작자가 모습을 드러내길 기대해본다.

리메이크의 시대, 창작보다 '재탕' 많았던 2015년
  • 페이스북
  • 트위터
  •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