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검한테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짜연애에 빠진 삼포세대

[이현지의 컬티즘<82>] 가상 시대에 빠진 우리들 모습이 두려워지는 이유

머니투데이 스타일M 이현지 칼럼니스트,   |  2016.02.26 10:43  |  조회 26174
컬티즘(cultism). 문화(culture)+주의(ism)의 조어. 고급문화부터 B급문화까지 보고 듣고 맛보고 즐겨본 모든 것들에 대한 자의적 리뷰이자 사소한 의견.
/사진=JTBC '님과 함께 시즌2 - 최고의 사랑' 방송화면 캡처
/사진=JTBC '님과 함께 시즌2 - 최고의 사랑' 방송화면 캡처
"나를 통해 세상을 타오르게 하라"는 말로 유명한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가 1953년에 발표한 SF소설 '화씨 451'은 미국 환상문학 장르에 큰 획을 그었다는 평을 받는다. 제목인 '화씨 451'은 책이 불타는 온도로, 소설은 책이 금지된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레이 브래드버리가 상상한 미래사회에서 사람들은 눈과 귀를 파고드는 가상현실 속에 산다. 캡슐로 된 가상의 음식들을 먹고 가상의 인간관계를 맺으며 가상의 공간에서 살아간다.

꽤 오래전에 읽은 그 책이 생각난 것은 이번주 신문 기사들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23일 "세계 최고의 VR(가상현실)을 구현하겠다"고 발표했고 같은 날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는 "조만간 우리 모두는 마치 함께 있는 것 같은 VR로 경험을 나누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 달 9일부터 이세돌은 '알파고'라는 인공지능 컴퓨터와 바둑대결을 벌인다. 예술계에도 VR 기술을 활용한 영상 작품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 24일에는 광화문 앞에서 '2.24 엠네스티 유령집회'라는 이름으로 홀로그램 시위가 열렸다. '화씨 451'의 미래사회가 지금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얼마 전 친구의 휴드폰 잠금화면에 연예인 이름으로 문자와 부재중 통화가 와있는 것을 봤다. 예를 들자면 "박보검 부재중 전화(5) / 보고싶다 / 내일 만날래?" 뭐 이런 식이다. 동명이인의 남자친구라도 생겼나 했는데 가상의 문자 알림이 적힌 사진이란다. '우리 결혼했어요' '불타는 청춘' 등의 가상 결혼 프로그램처럼 3인칭 시점에서 바라보던 타인의 가상연애가 1인칭 시점까지 확장한 것이다.

/사진='내 손안의 남자' 영상화면 캡처
/사진='내 손안의 남자' 영상화면 캡처
TV, 인터넷, 게임까지 나 홀로 연애할 수 있는 매체 종류도 다양하다. 박보검 문자 같은 '심쿵 잠금화면'부터 시청자가 여자 주인공 시점에서 회사 남자 동기와 다양한 상황을 경험하는 웹 드라마도 있다. '내 손안의 남자'는 아이돌 그룹 멤버가 주인공으로 나와 목걸이를 선물하고 불만도 털어놓는 등 진짜처럼 구는 가상 연애 모바일 콘텐츠다. 콘텐츠 유통도 실제 연애 기간처럼 100일간 연재했다. 지난해 말 기준 누적 조회수 1300만 뷰(view)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이에 질세라 게임업계도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남성과 데이트 코스를 선택하는 '21일 남친 만들기' 등을 시작으로 올 상반기 내 인기 웹툰 '치즈 인 더 트랩'도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출시된다고 한다. 이런 가상 연애 콘텐츠들은 가짜인 걸 알면서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가상 연애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꽤 된다. '가상현실'이 가장 먼저 침투한 우리 삶의 영역은 ‘연애’인 걸까.

가상 연애는 일단 편하다. 시간도, 돈도 들지 않고, 내 마음에 쏙 드는 남자가 내가 원하는 로맨틱한 상황을 연출해주는 비현실적인 마법을 자유자재로 부려준다. 그 행복과 만족감을 얻기 위해 내가 노력하거나 양보할 부분은 하나도 없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연애할 시간도, 돈도, 마음에 쏙 드는 상대도 없는 삼포시대의 젊은이들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하긴 뭐 어떠랴. 재미로 하는 건데. 한때 나도 가상의 딸을 키우는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시뮬레이션 게임에 흠뻑 빠져있던 때가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너무 사실적인 가상 연애들이 속속 등장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것이 어느 순간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처럼 진짜 현실을 대체하게 되어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사진=삼성전자
/사진=삼성전자
"모든 인간은 섬이다. 하지만 그 섬은 모두 연결이 돼있다."

영화 '어바웃어보이'에 나오는 대사다. 모든 인간은 섬처럼 고립된 존재들이지만 실제적인 관계맺음을 통해 각자의 섬을 연결시키며 살아간다는 뜻이다. 여기서 실제적인 관계맺음이란 서로에게 상처주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지만 서로 때문에 위로받고 기뻐하는, 실패 가능성과 불안감 때문에 더욱 값진 그러한 관계맺음이다.

하지만 VR을 체험하기 위해 커다란 고글을 쓰고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연결점도 보이지 않는다. 모바일 속 가상 콘텐츠에 설레는 마음 역시 바로 다음 순간 허전함이 밀려오는 거짓 감정이다. 언젠가 시뮬레이션 게임에 중독된 초등학생이 자신의 동생을 칼로 수차례 찔러 죽이고 난 후 "다시 살아날 줄 알았어요"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읽었던 것이 생각난다. 가상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문득 두려워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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