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만을 좇아 온 적나라한 한국인의 민낯을 만나다

[리뷰]고선웅 연출과 국립극단의 공동창작극 '한국인의 초상'

머니투데이 박다해 기자  |  2016.03.23 12:06  |  조회 5945
연극 '한국인의 초상' 공연 모습/ 사진제공=국립극단
연극 '한국인의 초상' 공연 모습/ 사진제공=국립극단

콩나물 시루 마냥 가득 찬 출퇴근길 지하철, 언제든 잘릴 수 있는 비정규직, 부모의 등골을 빼먹고 자라는 자녀들, 아이를 키울 형편이 안돼 유기하는 부모, 성형 권하는 사회, 중년 부부의 외도, 폐지 줍는 노인, 알코올과 도박에 빠진 삶,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묻지마 범죄, 스마트폰에 중독된 삶, '성공'을 부르짖으며 남과 비교하기 급급한 모습

모두 어디선가 본 적이 있거나 봤음직한 우리 삶의 단면들이다. 고선웅 연출은 이 단면을 조각조각 모아 연극 무대로 옮겨왔다. 배우들이 힘을 보태 27개의 에피소드를 완성했다. 연극 '한국인의 초상'은 그렇게 각 에피소드를 얼기설기 엮어 하나의 풍속화를 만들어냈다.

연극은 한국인의 적나라한 민낯과 치부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래서 더 익숙하지만 어쩐지 불편하기도 하다. 외면하고 싶던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도록 하기 때문이다.

극은 '기-승-전-결'의 드라마가 아닌 빠른 템포로 이어지는 옴니버스 형식이다. 자신의 역할을 쉼없이 전환하는 배우들의 연기를 감상하다 보면 90분의 러닝타임은 짧게 느껴진다. 담배를 꼬나문 10대 학생의 모습을 능청스럽게 연기한 백발의 배우 정재진의 연기는 극의 백미다.

자칫 우울하고 무거울 수 있는 소재를 우스꽝스러운 소재나 친숙한 음악을 이용해 친절하게 풀어내기도 했다. 성기 확대 수술을 통해 자신감을 찾은 중년 남성을 다루면서 거대한 바게트빵을 사용하는가 하면 경마도박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다룬 에피소드에선 '크라잉넛'의 '말달리자' 배경음악이 깔리는 식이다.

4면으로 탁 트인 무대를 십분 활용했다. 현대무용을 가미한 역동적인 동작으로 무대를 꽉 채운다. 배우의 땀방울이 보이고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리가 가깝다보니 관객의 몰입도도 높다.

연극 '한국인의 초상' 공연모습/사진제공=국립극단
연극 '한국인의 초상' 공연모습/사진제공=국립극단

숨 가쁘게 이어지던 극은 새벽을 보낸 대리운전기사가 동이 튼 아침을 맞이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해 봐. 해를 보라고. 해보는 거야. 매일 해보는 거야." 운전기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해를 보자고 이야기한다. 아침 해를 보자는 말과 '해보자'는 중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손뼉을 치며 '해보자'는 그의 말에 배우들은 하나둘 모여 무릎을 굽힌 '반가사유상'형태를 취한다. 순간 소극장 한쪽 벽면의 창이 실제로 열리며 진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어둡고 힘든 현실에도 버리지 않아야 할 희망의 메타포다.

"반가사유상은 생각을 버리는 상이고 사유가 끝난 평정에 이른 상태죠. 우리는 무엇이든 따지고 더 예민한, 무엇에 대한 대응논리를 만들려고 해요. 그냥 해 보자는 거죠. 반가사유상처럼 서 있는 정지상태에서 '다 나무 같아'라는 대사를 하거든요. 여기에 모든 이야기가 들어있어요. 한국인들이 평화를 얻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태평스러워지자, 그리고 뭐든 좋게 보자는 이야기죠" (연출 고선웅)

연출 고선웅의 말대로 극은 희망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쏟아진 햇빛을 등지고 나와 여전히 무거운 현실을 마주하면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현실에서 변하지 않은 한국인의 초상을 또다시 생각하게 한다. 연극은 오는 28일까지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계속된다.

'성공'만을 좇아 온 적나라한 한국인의 민낯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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