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겨서, 쿨한 것들!

홍준석 로피시엘 코리아 기자  |  2018.07.05 16:07  |  조회 4694
‘못생긴 옷’ 전성시대.


빛바랜 듯한 낚시 조끼와 아노락, 축 늘어진 페니 백, 어깨가 어딘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과장된 실루엣의 재킷까지 최근 유명인의 SNS와 패션 잡지는 온통 못생긴 옷으로 가득하다. 그 어디에서도 아름다움이나 섬세함이란 찾아볼수 없다. 동묘 구제 시장에 가면 널려 있을 법한 이 난감한 아이템들은 모두 하이엔드 브랜드의 2018년 봄/여름 컬렉션 제품이다.

대표적인 예로 발렌시아가는 낡고 펑퍼짐한 아노락과 투박한 운동화를 신은 모델을 대거 등장시켰고, 영국 클래식의 대명사 버버리는 러시아 출신의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와의 협업 컬렉션에서 어벙한 실루엣의 낚시 조끼와 반바지, 트랙 수트 등 이제껏 보아온 브랜드의 정통성과는 거리가 먼 아이템을 선보였다. 아이러니하 게도 이런 못생긴 옷이 ‘어글리 시크(Ugly Chic)’ 혹은 ‘고프 코어(Gorpcore)’라는 이름하에 새로운 트렌드로 떠올랐다. 전자는 못생길수록 더욱 멋스럽다는 의미고, 후자는 바람 막이 점퍼, 플리스 재킷 같은 기능성 아웃도어 의상을 아무런 맥락 없이 막 입은 듯한 스타일을 말한다. 여기서 ‘Gorp’ 는 트레킹이나 캠핑 등 아웃도어 활동을 할 때 먹는 간식인 그래놀라(Granola), 귀리(Oat), 건포도(Raisin), 땅콩 (Peanut)의 첫 글자를 딴 단어로 넓게는 아웃도어 의상을 지칭한다.

과거에는 말끔한 정장 위에 큼지막한 아웃도어 점퍼나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낚시 조끼를 입었다면 여지없이 패션 테러리스트로 낙인 찍혔겠지만, 올해는 이런 엉뚱한 믹스 매치 룩이 새로운 유행이 되는 드라마틱한 반전이 펼쳐진다. 이쯤 되면 몇 해 전 유행했던 ‘놈코어(Normcore)’ 트렌드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거다. 놈코어가 평범한 일상 복을 무심한 듯 멋스럽게 입는 방식이었다면 고프코어는 오직 기능과 실용을 우선시한 ‘아재 패션’에 가깝다. 해외여행이나 모임, 심지어 출근길에도 아웃도어 룩 차림인 중년 남성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된다. 버버리와 발렌시아가 외에도 고프코어의 매력에 빠진 디자이너는 많다. 마치 보이스카우트의 야외 유니폼을 연상 시키는 보머 재킷과 모자를 선보인 마르니, 펑퍼짐한 아노락과 캠핑용 모자를 매치한 루이 비통, 등산용 아우터와 넉넉한 실루엣의 밴드 스트링 팬츠를 매치한 구찌랑방, 그리고 샌들에 두꺼운 면양말을 매치한 프라다까지, 지금껏 촌스럽고 감각 없는 옷차림으로 치부되던 스타일이 말 그대로 트렌디한 룩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다 이런 못생긴 옷이 유행하게 됐을까? 그 중심엔 디자이너 뎀나 즈바살리아가 있다. 몇 해 전 베트멍 론칭과 함께 패션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그는 브랜드가 유명세를 타면서 2015년 발렌시아가의 디렉팅을 겸하게 됐다. 스트리트와 하이엔드, 풍자와 냉소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이 젊은 디자이너는 내놓는 아이템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현재 패션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로 부상했다. 게다가 탁월한 상업성과 번뜩이는 기발함으로 별것 아닌 물건을 별것으로 창조해내는데, 라이터 힐을 장착한 부츠, 매장용 쇼핑백을 모티브로 삼은 가죽 토트 백, DHL 로고 티셔츠가 대표적인 예다. 모두 우리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하고 흔한 아이템을 하이엔드 감각과 접목한 것.

이번 시즌 그의 발렌시아가 역시 다르지 않다. 펑퍼짐한 셔츠와 바람막이 점퍼를 마구잡이로 레이어드하고 푹 눌러쓴 후드와 비닐 봉투를 연상시키는 가방까 지, 니콜라 제스키에르, 알렉산더 왕 시절의 발렌시아가와는 좀처럼 교집합을 찾을 수 없는 캐주얼하고 못생긴 스타 일로 가득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반응은 매우 폭발적이었다. 특히 밀레니얼 세대는 그가 선보이는 못생긴 옷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며 자연스럽게 지금의 이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열성적 소비자이자 주체가 됐다. 해외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 래퍼 에이셉 라키, 리한나, 카일리 제너 같은 할리우드의 유명 인사가 그의 아이템을 입고 파파라치 컷에 등장하면서 고프코어 트렌드는 명실상부 대세임이 입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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