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를 내려놓으니 보이더라, 우리 것의 맛과 멋

[어디로? 여기로!] '남도해양열차' 타고 떠나는 전북 남원시 여행

머니투데이 김유진 기자  |  2016.08.12 03:10  |  조회 10100
서울역에서 출발해 여수로 향하는 '남도해양열차'(S-train) 내 '다례실'에서는 전남 보성군의 특산품인 녹차를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 /사진=김유진 기자
서울역에서 출발해 여수로 향하는 '남도해양열차'(S-train) 내 '다례실'에서는 전남 보성군의 특산품인 녹차를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 /사진=김유진 기자
남도해양열차 내 7080 콘셉트로 꾸며진 '추억의 상점' 칸에 있는 추억의 음악다방. 상점 DJ에게 노래를 요청하면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사진=김유진 기자
남도해양열차 내 7080 콘셉트로 꾸며진 '추억의 상점' 칸에 있는 추억의 음악다방. 상점 DJ에게 노래를 요청하면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사진=김유진 기자
추억의 상점에는 없는 것이 없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어릴 적 입었던 검은색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곤 한다. /사진=김유진 기자
추억의 상점에는 없는 것이 없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어릴 적 입었던 검은색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곤 한다. /사진=김유진 기자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금칠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허영자 시인의 '완행열차' 중에서)

KTX를 취소하고 무궁화 승차권을 끊는다. 2시간에서 4시간으로 늘어난 이동 시간을 느림의 즐거움이 채워주기를 기대하면서. 서울역에서 아침 8시쯤, 하루에 단 한대만 출발하는 '남도해양열차'(S-train)에 그렇게 몸을 싣고 전북 남원시로 향한다.

'남도해양열차'는 영남과 호남 모두를 여행할 수 있는 관광열차다. 2013년 운행을 시작한 이 열차는 무궁화호 객차를 사용하며, 겉모습은 거북선을 콘셉트로 꾸며졌다. 청룡의 얼굴을 한 이 열차는 서울역에서 매일 1차례 출발해 남도의 구석구석을 훑고 제자리로 돌아온다.

객실에 들어서니 뒤편에 마련된 '다방'이 눈에 들어온다. 전남 보성군에서 운영하는 '다례실'에는 군청 소속 다례 도우미가 상시 대기하며 맛난 녹차를 내려준다. 2000원이면 테이크아웃 잔에 보성에서 수확한 최고급 녹차를 마실 수 있지만, 이보다는 5000~7000원인 '다례체험'을 선택해보기로 한다.

좌식 테이블이 있는 공간에 앉으니 다례 도우미가 10여 가지의 다구를 가져와 눈앞에 펼쳐 보인다. "물을 버리는 그릇은 탕관, 물을 식히는 그릇은 수구예요. 이 친구는 차를 끓이는 다관이라고 하지요." 다구 각각의 쓰임새와 이름을 배운다.

뜨거운 물을 부어 식히고, 자그마한 찻잔을 데우고 비우는 과정에서 도시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내면의 '다소곳함'이 고개를 든다. 차분하고 예의바른 것이 이렇게까지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뜨거운 물을 만난 찻잎처럼 웅크리고 있던 마음이 펴지기 시작한다.

전북 남원시에 지난달 문을 연 '남원예촌'. 최기영 대목장을 비롯해 전국의 명장들이 모여 만든 남원예촌은 국내에 지어진 생활한옥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사진=김유진 기자
전북 남원시에 지난달 문을 연 '남원예촌'. 최기영 대목장을 비롯해 전국의 명장들이 모여 만든 남원예촌은 국내에 지어진 생활한옥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사진=김유진 기자
남원예촌 내 객실의 문을 여니 콩기름을 먹인 한지 바닥 위에 비단 금침이 곱게 깔려있다. /사진=김유진 기자
남원예촌 내 객실의 문을 여니 콩기름을 먹인 한지 바닥 위에 비단 금침이 곱게 깔려있다. /사진=김유진 기자
우리나라 사람들은 햇볕이 잘 드는 마당의 동편에 장독대를 놓았다. 가장 큰 독은 장독이며, 중간 규모는 된장이나 막장이 담겼다. 앞줄 가장 작은 항아리에는 고추장이나 장아찌류를 담아 반찬으로 삼았다. /사진=김유진 기자
우리나라 사람들은 햇볕이 잘 드는 마당의 동편에 장독대를 놓았다. 가장 큰 독은 장독이며, 중간 규모는 된장이나 막장이 담겼다. 앞줄 가장 작은 항아리에는 고추장이나 장아찌류를 담아 반찬으로 삼았다. /사진=김유진 기자
남원예촌에서 조식으로 제공한 전복죽. 이 외에도 우거지 해장국과 황태 해장국이 있다. /사진=김유진 기자
남원예촌에서 조식으로 제공한 전복죽. 이 외에도 우거지 해장국과 황태 해장국이 있다. /사진=김유진 기자
밤이 내려앉고 방 안에 있는 한지로 만들어진 조명을 켰다. 은은한 빛이 숙소를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사진=김유진 기자
밤이 내려앉고 방 안에 있는 한지로 만들어진 조명을 켰다. 은은한 빛이 숙소를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사진=김유진 기자

대청에 부는 서늘한 바람…우리 건축의 맛

남원 여정을 계획할 때, 우리 것의 즐거움을 온 몸으로 느끼고 오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지난달 남원시가 완공해 문을 연, 전통 한옥 체험장에서 호텔로 용도가 변경된 '남원예촌'에 담긴 대목장 어르신들의 예술혼도 엿보고 싶었다. 뼈대부터 기왓장까지, 한옥에 담긴 100% 요소를 모두 자연에서 찾았다는 이 건축물은 한 호텔 그룹이 위탁 운영을 하고 있다.

남원역에서 내려 차로 5분을 가자 '남원예촌' 정문이 나왔다. "이리 오너라!"하고 외쳐야 할 것만 같은 예촌문을 지나자 너른 황토 빛의 마당과 연못 가운데 세워진 정자 '부용정'을 비롯한 다양한 한옥 건축물이 눈앞에 펼쳐진다.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옻칠한 나뭇결이 황금빛으로 빛난다.

"우리나라에 있는 생활한옥 가운데 본보기로 삼을 만한 곳이 없어서, 그런 곳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세운 공간이야. 황토 흙으로 벽체를 세우고, 참나무 장작을 때어 구들을 달구고, 가옥 내부 바닥에는 콩기름 먹인 한지를 깔았지. 전부 자연에서 나온 재료로 만든, 천년을 갈 튼튼한 집이야."

남원예촌 건축 과정을 총 지휘한 최기영 대목장(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국가무형문화재 제74호)의 말처럼, 새 건물인데도 방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숲 속에 들어선 듯 나무 냄새가 난다. 지금까지 27t의 참나무를 먹었다는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는 불 냄새도 정겹다. 바닥에 깔린 푹신한 비단금침에 몸을 맡기니 절로 눈이 감긴다.

남원예촌 곳곳에 숨겨진 재미난 요소를 찾는 재미도 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문에도 '암수'가 있다. 둥근 문 손잡이가 달린 오른쪽 문이 '수컷', 작은 고리가 달린 왼쪽 문이 '암컷'이다. 두 문 사이의 틈은 대각선으로 깎여있어, 꼭 수컷 문 먼저 열어야만 문이 열린다는 사실. 대부분 사람들이 예촌에 와서 처음 알아가는 우리 건축의 숨은 이야기다.

남원의 가장 인기 관광지인 '광한루'(廣寒樓). 춘향과 이 도령은 이 곳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다. /사진=김유진 기자
남원의 가장 인기 관광지인 '광한루'(廣寒樓). 춘향과 이 도령은 이 곳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다. /사진=김유진 기자
전남 남원시 광한루 인근의 한옥 카페 '산들다헌'에서 맛볼 수 있는 대추빙수. 대추칩과 현미 크런치가 만들어내는 바삭한 식감이 일품이다. /사진=김유진 기자
전남 남원시 광한루 인근의 한옥 카페 '산들다헌'에서 맛볼 수 있는 대추빙수. 대추칩과 현미 크런치가 만들어내는 바삭한 식감이 일품이다. /사진=김유진 기자
광한루에서 주말 저녁마다 펼쳐지는 창극 공연. 춘향이를 낳은 국악의 성지, 남원시가 운영하는 남원시립국악악단에서 재미난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김유진 기자
광한루에서 주말 저녁마다 펼쳐지는 창극 공연. 춘향이를 낳은 국악의 성지, 남원시가 운영하는 남원시립국악악단에서 재미난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김유진 기자

'사랑의 도시' 남원에서 즐기는 로맨틱 코미디

남원은 성춘향과 이몽룡이 어화둥둥 업고 놀던, 사랑의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베스트 커플'이기도 한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찾는 사람은 아직도 많다. 남원시도 여행객이 그들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도록 곳곳에 춘향과 이 도령의 흔적을 남겨놨다.

남원예촌에서 걸어서 2분이면 도달하는 광한루(廣寒樓)는 춘향과 이 도령이 만나 첫 눈에 사랑에 빠진 장소다. 광한루 아래에 펼쳐진 연못 위에는 길이 33m의 아담한 오작교가 있는데, 이곳을 거닐며 두 사람은 사랑을 키웠다. 지금은 아이들이 쪼그리고 앉아 상점에서 산 2000원짜리 '잉어 밥'을 던져주는 공간이 됐다.

춘향이를 탄생시킨 남원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악의 맥이 이어지며 안숙선 등 명창을 낳은 '국악의 성지'가 됐다. 남원시립국악악단은 주말 저녁이 되면 광한루에서 창극 마당을 펼치는데, 관람객은 배꼽을 잡고 웃거나 '얼쑤'를 연발하며 공연을 즐긴다.

공연을 보고 돌아가는 길. 어둠이 내리니 한옥의 자태는 더욱 고와진다. 마당에 있는 석등에 불이 들어오고, 방 안에서 불을 켜자 창호지 너머로 빛이 흘러나오면서 창살의 무늬가 낮보다 훨씬 선명하게 보인다. 호젓한 달빛 아래 이 도령이 춘향이를 생각하며 거닐었을 것만 같은 풍경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사색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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