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 공장이 사라진 이유…마지막 남은 공장에 가다

Style M  |  2016.01.04 01:01  |  조회 980

[김은혜의 노닐다-2] 맥(脈)의 불씨 - 경상북도 의성 '성광성냥' 이야기


익숙했던 것들에서 낯선 무언가를 보거나, 낯선 곳에서 익숙한 것을 발견하기 위해 이곳저곳 방방곡곡을 노닐다.


/사진제공=김은혜 칼럼니스트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렸다. 오래된 것들이 많은 도시, 의성에 갔다. 도시는 조용했다. 그러나 왠지 모를 묵직함이 있었다. 터미널에 붙은 '고령 슈퍼'에 들러 우산을 하나 사서 길을 걸었다. 100년이 넘었다는 의성 초등학교와 의성교회를 지나 자그마한 동산 높이의 언덕으로 향했다. 그길 끝에 우리나라의 마지막 남은 성냥공장, '성광성냥'이 있었다.


공장 앞에 도착한 시간은 10시가 조금 안된 시각. 도착해서 전화를 하면 바로 공장 문을 열어주신다고 했지만 비도 오고 조금 이른 것 같아 바로 맞은편에 있는 의성향교로 발걸음을 돌렸다. 공장에서 향교까지는 스무 걸음도 채 되지 않는 것 같다.


잠깐 둘러보려 들어갔던 향교에서 나는 결국 두 시간을 넘게 시간을 보내고야 말았는데, 이곳에서 의성 토박이 어르신들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내가 방문한 날이 초하루 날이라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유현(儒賢)들에게 향을 피우는 의식을 치렀다고 했다. 어르신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의성에 대한 역사와 유교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경청했다. 내 소개를 할 때 '의성 김씨'가 아닌 '김해 김씨'여서 조금 아쉬워하시는 눈치였지만 유림의 후손답게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사진제공=김은혜 칼럼니스트


의성군민에게 있어서도 성광성냥은 역사적, 향토적, 경제적으로 의미가 있었다. 의성에서는 성냥을 '성냥' 대신 '다황'이라고 많이 불렀다. 이유는 성냥이 함양박씨의 입향시조인 '박성양'의 이름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의성에 박성양의 묘역이 있는 만큼 의성 사람들이 박성양에 대한 예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성광성냥이라는 이름에 들어가는 '성'이 바로 이 지역 '의성'의 '성'을 따온 것이다.

어르신들의 말에 따르면 6.25 전쟁 때 북에서 피난을 온 양태훈 선생(초대 대표)이 1954년에 성광성냥 공업사를 설립했다. 성냥산업이 호황을 누렸던 1970년대까지는 연매출 6억원 이상을 기록하는 등 전성기를 누렸다고. 실제로 의성군민의 많은 처녀 총각들이 '성광성냥'에서 일했다. 직원만 해도 거의 200명이 넘었으니 규모도 꽤 있었다. 이곳에서 처녀 총각들은 청춘을 다 바쳤다. 의성 토박이인 박금숙 문화해설사도 초등학교시절 겨울방학이 되면 성냥 1개비에 1원을 받는 일을 하기도 했다며 어릴 적을 회상했다.


/사진제공=김은혜 칼럼니스트


오후가 되어, 난 다시 스무 걸음을 걸어 성광성냥으로 향했다. 성광성냥의 기계들은 현재 쉬고 있다. 관리인 한분만 공장을 외로이 지키고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수십 년 간 이 공장에서 일을 해온 그는 공장을 돌며 성냥의 생산과정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이 나무를 얇게 펴고, 건조기를 타고 올라가서 말려지면 성냥 만드는 곳으로 가는 겁니다."


성냥은 일자로 쭉 뻗은 미루나무를 많이 사용한다. 미루나무의 껍질을 벗겨 얇은 판으로 뽑아내서 절단을 하는 것이다. 성냥공장이 많이 없어진 이유 중 하나가 이 원재료인 나무 때문이다. 중국에서 값싼 나무로 젓가락이나 성냥을 만들다보니 자연스레 국내의 좋은 품질의 성냥은 상대적으로 값이 비싸져 수요가 줄 수밖에.


큰 원목이 성냥 크기로 잘려서 모양이 갖춰지면 나무 끝에 두약(화약)을 묻히고 건조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성냥 한 개비가 만들어지는데 50번의 공정을 거치는 것이다. 실제로 공장 터도 넓었지만, 각각의 공정을 행하는 기계들이 열 개의 건물 안에 나누어 자리 잡고 있었다. 수많은 성냥들이 만들어지면 각각의 상자에 나뉘어 우리가 아는 그런 성냥갑에 포장이 되는 것이다. 관리인 아저씨는 성광성냥이 다른 성냥과 다른 점에 대해서도 말해줬다. "성냥갑 안에 나무를 넣어서 비가와도 눅눅해지지 않게 만든 게 특징이에요."


/사진제공=김은혜 칼럼니스트


기계를 들여다보니 신기하면서도 아주 섬세하다. 이 기계를 15~16년 전에 직접 고안해 만들었단다. 국내에 성냥을 만드는 기계까지 갖춰진 공장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그렇다보니 인도나 파키스탄 같은 데서는 이 기계를 사러 온단다. 몇 년 전에는 손으로 밥을 먹는 어떤 나라에서 온 사람이 사갔다고도 했다.


공장 벽면 여기저기에 한 단어가 계속해서 눈에 띈다. '불조심'이다. "불난 적이 많죠. 불나가지고 사람 막 그슬려 나오는 것도 기억나고요." 인화성 물질을 다루다보니 불이 날 위험이 많았다고 그는 설명했다. 게다가 예전 기계가 없던 시절에는 일일이 손으로 성냥을 만들어서 더욱 큰 위험에 노출되었을 터. "날씨가 더우면 자연바람으로 나무를 말리기도 하고 일일이 판에 알맹이를 껴서 끝에 화약을 묻히고 그렇게 해서 만들었었죠."


여기저기 멈춰버린 성냥공장의 모습을 담고 있으니 관리인 아저씨는 내 옆에서 계속 아쉬워했다. "공장이 운영될 때 오면 성냥 나오는 모습이 참 예쁜데 너무 아쉽네요. 빨갛고 까맣고 노랗게 돌아가면 착착 나오는 모습이 되게 멋있거든요." 소음과 화약 냄새로 가득할 테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손들과 흐르는 땀으로 가득한 그런 생기 있는 곳. 내 앞에 놓인 먼지 쌓인 기계가 굴러가는 상상을 잠시 동안 해본다.


/사진제공=김은혜 칼럼니스트


"공장은 다시 운영될 수 있는 거죠?" 나 역시 기계들이 이렇게 멈춰있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아까워 나도 모르게 아저씨께 여쭈었다. 군에서 지원이 된다면 박물관이나 전시관으로 보존될 수도 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성냥과 자신은 삶을 같이 했다고 말했다. "나도 그렇지만 여기서 청춘 다 바친 사람 진짜 많아요. 국민 학교 졸업하고 와서 쉰 살이 다되어서 나간 사람도 있어요. 열세 살, 열네 살에 와서 일하기 시작해 여기서 시집장가가고 아들 손자 보고 했으니까."


공장을 나와 돌아오는 길에 다시 향교에서 만난 어르신을 만났다. "이 향교라는 곳은 공부를 하던 곳이었어요. 유학이라고 하지만 간단히 말해서 나보다 먼저 살아온 그 사람의 삶을 똑같이 실천하고 노력하는 게 옛날의 학문이거든. 그런 식으로 이천 년 전에 공자가 말한 내용이 아직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또 최근에는 인문학열풍이 돌면서 다시 떠오르고 있는 것도 어떤 과거와 현재에 같이 흐르는 맥이 있다는 거거든요."


학문이든 역사든 추억이든 간에 맥(脈)이란 것은 어쩌면 각자의 운명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지킬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상관없이 마주보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던 향교와 오래된 성냥공장의 스무 걸음 사이에는 '계속 지켜 나가야하는'의미의 같은 맥이 흐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의성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느꼈던 왠지 모를 그 묵직함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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