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의 포르노(?)…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놓친 것

[이현지의 컬티즘<38>] 여성 시각의 소설이 남성·중릭적 시각의 영화로 바뀌며 매력이 떨어졌다

머니투데이 스타일M 이현지 칼럼니스트,   |  2015.03.09 09:23  |  조회 10601
컬티즘(cultism). 문화(culture)+주의(ism)의 조어. 고급문화부터 B급문화까지 보고 듣고 맛보고 즐겨본 모든 것들에 대한 자의적 리뷰이자 사소한 의견.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스틸컷/사진제공=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스틸컷/사진제공=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기대와 달랐다. 호평을 쓸 수 있는 영화이길 바랐다. 평론가들이 "가볍고 천박하다", "최악의 영화" 등 혹평을 쏟아내고 있지만, 포스터나 미리 들어본 OST에 기대감이 증폭됐다. 노골적이고 변태적인 성적 묘사로 호불호가 갈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남자 그레이와 아슬아슬하게 펼쳐지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입 밖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쾌락의 세계'가 신선한 재미를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터져나오는 것은 감탄이 아닌 실소였다.

이유가 무엇일까. 원작이 궁금해서 서점으로 달려갔다. 원작부터 문제가 있는 것인지, 영화가 원작을 못 살린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원작은 원래 영화 '트와일라잇'의 광팬이었던 영국의 한 주부가 팬픽 사이트에 게시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인터넷 소설이다. 2012년 출간돼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세계 각국의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엄마들의 포르노(mommy porn)'라고 불리고 있다. 얼마 전에는 1박 2일간 이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하는 관련 패키지 상품이 출시됐는데 가격이 한화로 1000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소설은 확실히 영화보다는 흡입력이 있다. 작품성이 영화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다. 원작 소설에 혹평을 쏟아붓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의견은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것인데, 이 소설은 애초부터 작품성을 목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대중적 사랑을 받은 인터넷 소설, 인기 있는 하이틴 소설에 문학적 작품성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무리다. 가벼운 재미를 위해 아마추어가 쓴 소설이고, 그 역할을 확실히 하고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가 분석한 이 소설의 흥행 요인 세 가지는 인터넷으로 유포되면서 독자들의 반응에 따라 추가, 삭제되며 완성된 소설이라는 것, 신분차이를 극복해 로맨틱한 상황으로 이끄는 연애 소설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는 것, 쾌락에 관한 자기계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스틸컷/사진제공=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스틸컷/사진제공=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그 이유들에 덧붙여, 영화에서 놓친 소설의 매력은 그레이의 캐릭터다. 영화를 보기 전 기대했던 그레이의 캐릭터가 소설에는 그대로 녹아있었다. 섹시하고, 종잡을 수 없으며, 자신감이 넘치는 옴므파탈. 어마어마한 부자이지만 사실은 아픔을 가지고 있으며, 순진한 여대생을 쾌락의 세계로 이끄는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 여자들이 정신 못 차리고 빠져드는,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여자들 사이에서 풍문으로 떠도는 그런 캐릭터의 남자다. 하지만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기에 배우 제이미 도넌의 연기 경험이 좀 부족했던 탓일까. 어쨌든 영화 속 미스터 그레이는 뭔가 어설프고, 과장되며, 혼란스러운 느낌이다.

영화에서 매력적인 주인공은 영화의 내용과 작품성을 뛰어넘는 흥행의 보증수표가 된다. 국내 엄청난 흥행몰이로 제작진까지 놀라게 한 영화 '킹스맨'이 좋은 예다. 사실 킹스맨도 작품성의 측면으로 볼 때는 뛰어난 수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스토리 전개가 허술하고, 플롯이 늘어지며, 최첨단 장비들도 사뭇 억지스러운 느낌이 든다. '킹스맨'에 대한 해외 전문가 평점이 그다지 높지 않은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 콜린 퍼스가 보여주는 킹스맨 캐릭터는 이 모든 것을 덮고도 남는다. 제이미 도넌 역시 자신의 섹시함을 무기로 그레이의 캐릭터를 확실하게 보여줬더라면, 이 영화는 흥행했을지도 모른다.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스틸컷/사진제공=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스틸컷/사진제공=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또 한가지, 소설은 철저히 여성의 시각에서 쓰여졌다. 여성이 쓰고 여성 독자가 덧붙이며 완성된 이 소설에서는 여대생의 시각으로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여성의 입장에서 쾌락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읽는 여성 독자들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상황에 몰입할 수 있다. 어쩌면 자신의 첫 경험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여성의 시각이 아닌 중립적 시각, 혹은 남성의 시각으로 전체적 사건을 구성해 여성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지점을 놓치고 만다.

여성의 입장에서 쾌락에 도달하는 성적 유희를 디테일하게 묘사함으로써 '자기계발서', '소원해진 부부관계를 회복시켜주는 책'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는 이 부분 역시 심심하기 그지없게 표현돼 버린다. '19금'을 달고, 섹시함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 치고는 이 부분이 이상하리만치 평범하다. 결국 재미는 차치하고 섹시한 장면이라도 나오길 기대한 관객들에게도 실망감을 안겨준다.

영화에서 소설의 흥행 요인을 조금도 짚어내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부분이다. 심지어 영화가 너무 급작스럽게 끝나는 바람에 관객들은 영화가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한참동안 앉아있어야 했다. 뒤늦게 3부작이라는 소식을 접했지만 영화의 특성상 한 편, 한 편이 그 자체로서 완성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소설의 흥행 요소를 살리면서 소설에서 부족한 부분을 영화라는 매체적 특성으로 보완해 작품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 충분히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 미숙함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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