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퀴아오는 왜 어깨부상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나섰을까

[이현지의 컬티즘<47>] 긴장감과 카타르시스가 없었던 '세기의 대결'

머니투데이 스타일M 이현지 머니투데이 칼럼니스트,   |  2015.05.11 10:57  |  조회 3833
컬티즘(cultism). 문화(culture)+주의(ism)의 조어. 고급문화부터 B급문화까지 보고 듣고 맛보고 즐겨본 모든 것들에 대한 자의적 리뷰이자 사소한 의견.
/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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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들에게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절대 가족을 만들지 말 것. 이유는 간단하다. 약점이 생기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죽이고, 그로인해 늘 보복당할 위험에 처하는 킬러들에게 '소중한 것'은 바로 약점이 된다. 가족 뿐만이 아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다시 말해 잃을 것이 많아질수록 겁이 많아지고 몸을 사리게 되기 마련이다. '세기의 대결'이라고 주목을 받았던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경기를 보며 이런 킬러들의 규칙이 생각났던 것은 우연일까.

47전 무패의 복서 메이웨더와 만화에서도 설정이 불가능하다는 8체급 석권의 주인공 파퀴아오는 복싱계의 전설이다. 그리고 두 선수 모두 불혹에 가까워진 지금, 메이웨더는 세상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스포츠 선수이자 사업가이고, 파퀴아오는 필리핀의 국회위원이다. 부와 명예,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도 얻었다. 복싱을 처음 시작할 때와 달리 그들은 이제 잃을 것이 너무나 많아졌다.

나는 복싱팬이 아니다. 사실 복싱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적이 없고 이 경기 전까지는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존재조차 몰랐다. 하지만 그들의 이력과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온 가족이 점심 식사시간을 늦춰가며 경기를 관람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복싱팬들은 어땠을까. 대전료만 약 3억달러에 달하고 입장료 암표가 최고 2억7000만원에 거래될 정도로 팬들의 기대는 컸다. 11만원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시청료를 내고 이 경기를 보려는 시청자들이 몰려서 경기가 한 시간가량 지체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과는 싱겁다 못해 참담했고 관객들은 실망을 넘어 분노했다.
/AFPBBNews=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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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졸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메이웨더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왼쪽 어깨로 미끄러지는 노련한 수비를 보여줬고, 파퀴아오 역시 어깨 부상을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몇 번의 재빠른 훅으로 건재함을 보여줬다. 하지만 우리가 원한 것은 그 이상이었다. 2005년 파퀴아오와 에릭 모랄레스의 3차전에 걸친 혈전까지는 아니어도 좋다. 적어도 이런 점잖은, 흡사 쇼케이스 같은, '서로 다치게는 하지말자라는 사전 합의가 의심되는, 그런 경기는 아니었다.

결국 복싱팬들은 부상을 감추고 경기를 진행한 파퀴아오를 상대로 500만 달러의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파퀴아오는 오른쪽 어깨 회전근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수술을 받아야하며 재활에 최소 9∼12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이에 따라 파퀴아오와 메이웨더의 재대결 역시 사실상 무산됐다. 아직도 궁금하다. 파퀴아오는 오른쪽 어깨 부상이 있었음에도 굳이 경기를 진행해야 했을까. 최상의 컨디션에 임했어도 이길 가능성이 크지 않은 경기를 말이다. 지더라도 그럴싸한 변명거리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이렇게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은 경기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한 기자는 이 경기를 두고 '시대의 마감'이라고도 표현했다. 메이웨더와 파퀴아오만큼의 커리어와 스토리를 가진 새로운 스타들이 탄생하려면 앞으로 십 수년이 걸릴 것이고, 그들이 링 위에서 대결을 하는 모습을 보기란 그보다 더한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아쉬움을 넘어 분노까지 한 건 그 때문이다. 우리 시대 마지막이 될 것이라 예상되는 '세기의 대결'이 너무 허무하게 끝나버린 것이다.

스포츠는 인생의 축소판이다. 기본적인 룰이 있고, 그에 따른 경기가 펼쳐지는 매우 합리적인 인생이기도 하고, 언제든 역전의 기회가 있어 팽팽한 긴장감과 카타르시스를 주는 인생이다. 작년의 울분을 씻고 매 경기 역전의 신화를 쓰는 한화의 경기나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전에서 뚫리지 않을 것 같은 수비 사이로 아슬아슬한 골을 꽂아 넣는 리오넬 메시의 슛을 볼 때 우리가 느끼는 그런 카타르시스 말이다. 하지만 '세기의 대결'에 그러한 긴장감과 카타르시스는 없었다. 누리꾼들의 말처럼 경기 중간 광고를 선점한 음료브랜드만이 최후의 승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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