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죽이는 딸들, '잔혹동시' 그리고 '차이나타운'
[이현지의 컬티즘<48>] 철저한 생존법칙이 '엄마'라는 최후의 안식처마저 빼앗아 간다
머니투데이 스타일M 이현지 머니투데이 칼럼니스트, | 2015.05.18 09:11 | 조회 8405
컬티즘(cultism). 문화(culture)+주의(ism)의 조어. 고급문화부터 B급문화까지 보고 듣고 맛보고 즐겨본 모든 것들에 대한 자의적 리뷰이자 사소한 의견.
영화 '차이나타운' 스틸컷/사진=CGV아트하우스 |
'모친살해'는 그것이 은유적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매우 충격적인 모티프다. 다른 가족들과 잘 놀던 아기가 졸리거나 아픈 순간에는 반드시 엄마를 찾듯이, 어머니라는 존재는 우리에게 최후의 보루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선상에 있는 '부친살해'가 공공연히 많은 서사에 활용된 주제인 것에 비해 '모친살해'는 많이 다루어지지 않은 것도 그 이유다.
영화 '차이나타운'이 매력적이라고 느꼈던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영화 중간에 차이나타운의 대모인 '엄마(김혜수 분)'가 자신의 엄마를 죽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영화 마지막에는 주인공 일영(김고은 분)이 자신이 '엄마'라고 부르는 존재를 죽인다. 일영이 죽인 사람은 친모가 아니다. '엄마(김혜수 분)'가 죽였다는 사람도 친모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명백히 '모친살해'의 모티프를 전면에 드러내고 있다.
영화 '차이나타운' 스틸컷/사진=CGV아트하우스 |
사실 영화 자체만 두고 보자면 뭔가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신선한 주제와 훌륭한 캐스팅, 장르적 이점을 제외한다면 전체적 내러티브는 매우 거칠고 상투적이다. 전체적인 내러티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설명들이 빠져있고, 그 빈 공간을 느와르적 쾌감이 묻어나는 몇몇 멋들어지는 장면들로 뭉개버린다. 감독이 원하는 장면을 위해 나머지 장면들을 어색하게 끼워 맞추다보니 전체적인 완성도와 흐름이 깨지고, 몇몇 상투적인 클라이맥스만이 거칠게 솟아있는 느낌이다.
예를 들자면, 첫 장면인 석현(박보검 분)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며 오열하는 일영(김고은 분)의 모습을 위해 배치된 이들의 첫 만남 장면 역시 지극히 어색하고 개연성이 떨어진다. 일영의 어두움을 대비시키기 위해 보여주는 석현의 밝고 바른 모습은 너무 과도한 손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고리사채업자로 찾아온 사람에게 스파게티를 만들어주는 사람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주먹을 입에 물고 우는 조인성의 초창기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신인 박보검의 연기력만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차이나타운'은 올해 칸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 영화적 완성도 때문이 아닌 앞서 말한 주제적 깊이 때문일 것이다. 철저히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쓸모에 따라 죽고 사는 영화 '차이나타운'의 세계는 잔혹하지만 현실적이다.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만 걱정하기에도 바쁜 삼포세대, 늘 '쓸모'를 증명해야 하는 우리가 사는 세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안에서 주인공 일영(김고은 분)은 자신을 부정하는, 혹은 자신이 부정하는 존재로 끊임없이 회귀한다. 이유는 '갈 데가 없어서' 혹은 '배고파서'다. 이 모습 역시, 지금의 우리들과 크게 다르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잔혹동시를 쓴 초등학생도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이러한 현실을 앞서 시적 은유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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