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묵힌 장맛이랄까.
보이차를 처음 만났을때의 느낌이다. 보이차는 녹차를 자연 상태에서 발효시켜 만든 차다. 약용으로도 널리 쓰일 만큼 맛 뿐 아니라 쓰임도 훌륭하다.
발효차라는 특성은 음식을 삭혀 먹는 한국인 입맛과도 어울린다. 얼핏 지하실의 음습한 곰팡이 냄새같기도 하지만 먹을수록 오묘한 뒷맛에 자꾸 찻잔에 손이 간다.
김해준 교보증권 대표도 만날수록 구수한 맛이 우러나는 보이차를 닮았다.
20년 묵힌 보이차, 맛의 깊이에 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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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보증권 김해준 대표. |
김 대표의 보이차 사랑은 각별하다. 그가 갖고 있는 보이차 종류만 수십여개. 최상급은 수천만원을 호가한다. 인사동 보이차 가게에서 김 대표를 찾아와 귀한 보이차를 자기에게 팔아달다고 사정할 정도다.
김 대표가 보이차를 처음 접하게 된 건 15년 전. 우연한 기회에 마셔 본 보이차의 맛에 홀딱 반했다. 불교에 심취해 있던 김 대표는 스님들의 소개로 당시 최상급 보이차를 수집할 수 있었다.
보이차의 발효 기간은 찻잎의 독을 없애고 맛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족히 20년을 잡는다. 숙성 기간이 길다보니 가격도 꽤 나가 주로 부유층이 즐겼다. 그런데 1등급 보이차는 중국엔 거의 없다.
"1966년 중국의 문화대혁명 당시 보이차는 자본주의가 녹아 든 사치품으로 낙인 찍혔죠. 그래서 오래된 최상급 보이차를 대만이나 외국에 모두 팔아 버렸습니다. 만약 중국에서 1급 보이차를 팔고 있다면 가짜를 의심해야 합니다."
보이차는 모양에 따라 빈대떡 모양으로 굳힌 병차(餠茶)와 찻잎이 흩어져 있는 산차(散茶) 등으로 크게 나뉜다. 시음해 본 보이차는 '동경노산차'였다. 보이차 제조 가게들이 모인 동경호 지역에서 1950년대에 만든 산차다. 발효 기간이 20년을 넘으면 노(老)자를 붙인다.
보이차는 매우 얇은 찻잔에 마신다. 잔을 들어 빛에 비추면 잔 안쪽 무늬가 바깥쪽 표면에도 드러날 정도다. 끓인 물의 온기를 잔에 뺏기지 않고 온전히 머금고 있어야 제 맛이 나기 때문. 어느 정도 식혀 먹어야 해서 잔을 두껍게 만드는 녹차와 반대다.
보이차전용 주전자인 자사호(紫砂壺)는 돌을 갈아 만든 가루로 빚는다. 온기를 유지하는 데 적합하다고 한다. 상하이 인근 산에 있는 돌을 사용하는데 최근 산이 다 없어질 정도로 돌을 캐내는 바람에 예전과 같은 자사호는 더 이상 만들 수 없다. 시음에 사용한 자사호는 1910년도에 만든 것으로 가격은 60~70만원. 자사호 만드는 기술자도 급수가 나뉠 만큼 대우를 받는다. 김 대표가 갖고 있는 국보급 자사호는 부르는 게 값일 정도다.
보이차, 다도(茶道) 아닌 다예(茶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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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사호로 따른 보이차. |
혹시 무릎 꿇고 경건하게 맛 봐야 하는 걸까.
중국의 차 문화는 일본처럼 딱딱한 격식이 없다. 절차를 밟긴 하지만 차 맛을 끌어올리기 위한 목적이다. 보이차를 자사호에 넣고 물을 끓인다. 끓인 물을 자사호에 붇는데 첫 물은 차 잎의 노폐물을 씻는 용도여서 버린다. 세차(洗茶)라 한다. 찻잔을 덥히기 위해 뜨거운 물로 잔을 씻는다. 온배(溫杯)의 절차다. 그런 다음 다시 물을 자사화에 넣고 우려 내 마신다. 김 대표는 "물의 독을 없애기 위해 은을 섞어 끓이면 더 좋다"고 한다.
보이차를 연달아 먹으니 속이 데워지면서 등줄기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몸속에 쌓인 노폐물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술 먹은 다음날 해장하기에도 좋을 것 같다.
김 대표는 일본식의 엄격한 다도(茶道)를 멀리한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부터 다도의 격식을 까다롭고 엄숙하게 만들었습니다. 다도를 통해 무사정신을 기르려고 한 겁니다. 하지만 중국은 차를 편하게 마십니다. 우리나라도 일본식 다도가 스며들었는데, 저는 격식을 차리기보다 편하게 즐기는 걸 좋아합니다."
중국에선 다도라 하지 않고 다예(茶藝)라 부르는 것도 격식보다 즐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8만원짜리 보이차 10년새 2000만원 훌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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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차 형태의 보이차. |
보이차를 좋아하는 사람은 와인 마니아인 경우가 많다.
"원래는 와인을 좋아했죠. 보이차와 와인은 맛을 숙성해가는 과정이 비슷합니다. 보이차 마니아가 와인을 좋아 하는 것도 이 때문이죠. 맛을 보면 몇 년 된 보이차인지 맞춥니다." 보이차 소믈리에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보이차 종류는 수백만가지로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보이차 제조가게는 여러 군데서 딴 녹차 잎을 모아 섞어 최고의 맛을 만든다. 위스키의 블랜딩인 셈이다. 기술자가 어떻게 섞느냐에 따라 보이차의 품질이 갈린다. 보관 상태의 미세한 변화에 따라 맛이 또 달라진다. 이를 테면 그해 강우량에 따라 모차가 머금는 습기가 달라져 맛이 변할 만큼 예민하다.
김 대표는 농담 섞어 "최고의 재테크는 차(茶) 테크"라고 말한다. 10년 전에 8만원 주고 산 보이차는 요즘 1000만원 넘기도 한다. 100배이상 가격이 뛴 셈이다.
"5년전부터 국내에서도 보이차가 관심을 받기 시작했는데 웰빙 열풍과 맞물리면서 보이차를 찾는 이가 갈수록 늘고 있거든요. 그런데 20년 이상 되고 맛이 뛰어난 보이차는 한정돼 있는데 계속 소모하고 있으니 수요 공급 차원에서 보면 보이차 가격은 계속 뛸 수밖에 없죠. 예전에 사지 않았다면 지금은 맛 볼 수 없는 보이차를 먹고 있다고 생각하면 절로 행복해집니다."
보이차는 중국 윈난(雲南) 성 남부지방이 원산지로 2000년가량 역사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보이차를 말이나 당나귀에 싣고 티베트나 네팔, 인도에 수출한 길을 차마고도(茶馬古道)라 한다.
김 대표의 남다른 보이차 사랑 덕에 교보증권 사내에도 '차마고도'란 보이차 동아리가 생겼다. 김 대표가 임원시절 직원들에게 보이차 '대접'을 해준 후 맛에 빠져들어 생겼다. 매주 수요일 여의도 찻집에 모여 보이차를 즐긴다.
보이차의 폴리페놀 성분은 지방을 분해하는 효과가 있어 동맥경화나 고지혈증의 예방 치료에 도움을 준다.
김 대표는 종합검진을 받으면 혈관 상태나 콜레스테롤 수치가 30대 수준이다. 의사가 놀라서 물으면, "특별히 관리하는 건 아닌데, 오랫동안 보이차를 먹은 효과겠죠." 김 대표의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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