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 소설의 진화, 히가시노 게이고의 '공허한 십자가'

[이현지의 컬티즘⑱]히가시노 게이고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를 균형있게 끌고 간다

머니투데이 스타일M 이현지 칼럼니스트,   |  2014.10.06 08:48  |  조회 6071
컬티즘(cultism). 문화(culture)+주의(ism)의 조어. 고급문화부터 B급문화까지 보고 듣고 맛보고 즐겨본 모든 것들에 대한 자의적 리뷰이자 사소한 의견.
영화 '용의자X' 스틸컷.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용의자X의 헌신'을 영화화한 작품/사진=CJ엔터테인먼트
영화 '용의자X' 스틸컷.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용의자X의 헌신'을 영화화한 작품/사진=CJ엔터테인먼트

몇 달 전,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소설 창작반 수업을 들었다. 새로운 문체와 내용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절필을 선언했던 작가 백민석이 진행하는 수업이었다. 마음 한 구석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는 나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사실 백민석 작가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이지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서 수업을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소설을 쓰는 것에는 법칙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민석 작가의 말은 달랐다.

그의 말에 따르면 소설을 쓰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우선 버니지아 울프 식의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는 것. 소설가 한유주를 비롯한 최근 젊은 작가들의 방법으로, 예컨대 작가는 소설 집필이 끝날 때까지 소설의 주인공이 어떻게 될지 모를 수도 있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불러내는 형식이다. 감정의 미세한 변화에 주목하고 작품 내 드라마가 중요한 소설들, 즉 연애나 가족 이야기 등 가벼운 주제의 소설이나 드라마 중 이렇게 집필되는 작품이 많다.

또 다른 방식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후 집필에 들어가는 것. 백민석 작가도 이 방식을 택한다고 한다. 대부분 복잡한 사건을 다루거나 사회성을 반영한 작품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집필된다. 마쓰모토 세이초, 미야베 미유키 등 일본의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들 역시 이러한 부류다. 사회성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사전 조사와 인물 설정 등 처음부터 완벽하게 짜여진 구성 아래 사건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로 묶이기도, 때로는 묶이지 않기도 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은 어떨까. 물론 추리 소설의 특성상 철저한 계획 아래 글을 쓰는 후자의 방법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여타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들보다 작품 내 드라마적 요소가 많다. 사회적인 이슈를 배경으로 한 사건들을 중심에 두고 많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마치 거미줄처럼 한 줄 한 줄 엮어지며 중심에 있는 사건을 향해 다가가는 구성이다. 사건에 대한 해결만이 주를 이루던 기존 추리 소설의 진화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 '공허한 십자가'/사진=자음과 모음
히가시노 게이고 '공허한 십자가'/사진=자음과 모음

지난달 15일 국내 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소설 '공허한 십자가'도 마찬가지다. 두 건의 살인 사건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전개 중 살인과 사형제도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으로 떠오른다. 여기에 속죄, 생명권, 낙태 등 미묘한 문제들이 가세하며 독자는 살인 사건 뿐 아니라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작가의 복합적인 질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모든 충격적인 사건에는 거기에 얽힌 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있다는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때로 어떤 사건을 해결함에 있어서 우리는 단편적인 사실에만 주목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자면, 'A가 B를 죽였을 경우 A는 가해자이고 B는 피해자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 더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A는 감옥에 가거나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이 사건에는 A와 B 이외에 C와 D라는 중요 인물이 더 있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는 뒤바뀔 수도 있다. 그리고 때로 형벌이라는 것이 죄를 지은 사람에게 아무런 속죄의 기회를 주지 않는 '공허한 십자가'가 될 수도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의 매력은 이렇게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를 균형있게 끌고 간다는 데 있다. 사회적 이슈를 다루면서도 드라마적 구성을 놓치지 않는 그의 소설은 늘 사건보다 사람과 사연을 중심에 둔다. 그의 작품이 많이 영화화 되고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이유다.

다작하기로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는 올해 9월만 해도 두 권의 작품을 발표했다. 다작하는 작가 중에 모든 작품이 좋은 경우는 드문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런 면에서 참 특별한 작가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고 생각되는 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본다.
추리 소설의 진화, 히가시노 게이고의 '공허한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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