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를 부탁해"…'불금'에 낯선 사람들과 집밥 만들어보니

처음 만난 사람들과 요리하며 몸과 마음 '힐링'하는 사람들…'집밥'의 위력 소셜 다이닝 사이트 인기

머니투데이 스타일M 배영윤 기자  |  2015.04.20 09:19  |  조회 6333
/사진=루비마로 요리공방
/사진=루비마로 요리공방
"밥 지어 먹을래?"

지인들끼리 안부를 전할 때 흔히 "밥 한번 먹자"고 한다. 하지만 기자의 절친 K는 '밥 지어 먹자'는 메시지와 함께 온라인 링크 주소를 보내왔다. 그녀가 보낸 링크는 어느 블로거의 '소셜 다이닝' 관련 포스팅.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만나 밥을 만들어 먹고 오손도손 대화를 나누면서 '힐링'을 하자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기자뿐아니라 현대인들 대부분 집에서 먹는 밥, 일명 '집밥'에 대한 그리움이 마음 한켠에 자리해있다. JTBC '냉장고를 부탁해', tvN '삼시세끼', 올리브 '신동엽, 성시경은 오늘 뭐 먹지?' 등과 같은 프로그램의 인기가 이를 방증한다. 냉장고 속 처치 곤란 재료들이 15분만에 레스토랑급 요리로 변신하는 모습을 보여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하고 스타들이 직접 요리를 하는 모습을 보며 따라하고 싶은 욕구도 샘솟는다.

이러한 요리 바람이 소셜모임에도 강하게 불고 있다. 단순히 같이 모여 밥을 먹는 것을 넘어 재료 준비부터 조리에서 세팅, 식사까지 한번에 해결하는 모임에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내게 맞는 모임 '찾기'부터 '신청'까지…
/사진=집밥 커뮤니티 사이트 캡처
/사진=집밥 커뮤니티 사이트 캡처
자취 경력과 요리 실력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기자 역시 오랜 자취 생활을 해왔지만 여태껏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비법조차 터득하지 못했다. 한달에 한번씩은 어머니가 반찬을 만들어 냉장고를 채워주시지만 직장 생활을 하다보니 집에서 밥 지어 먹기가 쉽지 않다. 어쩌다 집밥 좀 먹어볼까 하고 반찬 통을 열어보면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상해 있는 일이 다반사다. 직접 요리를 해보겠다며 마트에서 사왔던 재료들 역시 말라 비틀어진 채 냉장고 안에서 간신히 연명하고 있다.

유명 소셜다이닝 사이트 '집밥( www.zipbob.net )'에서 모임을 검색했다. 이 사이트에는 요리관련 모임 외에도 취미, 봉사, 지식 나눔 등 다양한 모임이 개설돼 있다. 자신이 게스트가 되기도 하고 호스트가 될 수도 있다. 원하는 카테고리와 지역을 검색하고 모임 성격을 알 수 있는 소개 멘트와 지난 모임의 후기를 꼼꼼히 읽어보며 나에게 맞는 모임을 찾을 수 있다.

기자에게 필요한 것은 병들어가는 냉장고를 살려낼 모임이었다. 참가비, 준비물 등 물리적인 조건까지 마음에 쏙 드는 모임을 찾았다. 인기 프로그램인 '냉장고를 부탁해'와 이름도 콘셉트가 같아 얼른 참가 신청 버튼을 눌렀다.

◇'불금'에 모인 낯선 사람들…요리로 불태우다
/사진=루비마로 요리공방
/사진=루비마로 요리공방
'불금' 저녁, 친구들과의 술자리 대신 '냉장고를 부탁해' 모임을 선택했다. 서울 은평구의 한 오피스텔에 위치한 루비마로 요리공방에서 진행되는 이 모임은 공방 대표인 푸드닥터 강정화씨가 호스트다. 이 모임 외에도 '월요 원테이블 디너', '벚꽃 피크닉' 등 다양한 성격의 '소셜쿠킹'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모두 '집밥' 사이트내에서 다수의 '앵콜'을 받는 인기 모임이다.

'냉장고를 부탁해' 모임의 진행 방식은 이렇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자기 소개를 하고 각자 냉장고에서 가져온 음식들을 꺼내 놓는다. 모인 재료를 가지고 토론을 통해 그날 만들 메뉴를 칠판에 적는다. 담당할 메뉴를 배분한 뒤 각자 요리에 들어간다. 요리가 완성되면 보기 좋게 세팅해서 다 같이 둘러 앉아 맛있게 먹으면 끝.

퇴근길이라 차가 막혀 예정 시간보다 다소 늦게 공방에 도착했다. 양복과 캐주얼차림 남성 2명과 푸근한 인상의 여성, 그리고 강정화씨가 이제 막 요리를 시작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호스트를 포함해 이날 모인 5명이 만들기로 한 요리는 봄에 빠진 김밥, 연어 스테이크, 반전의 바나나튀김, 부대찌개, 브루스케타, 유뷰&두부 샐러드, 화전, 당근스틱 등 총 8가지였다.

기자는 집에서 챙겨간 봉투 속에서 오래된 떡국용 떡, 말라 비틀어진 당근과 호박 반토막, 달걀 5개, 그리고 조그라든 한라봉 한 개를 꺼냈다. 떡과 야채, 달걀은 '부대찌개 담당자'에게 넘겼다. 기자는 두부와 유부, 샐러드용 야채들을 건네 받고 한라봉과 함께 샐러드를 만들었다. 분주함이 낯섬을 녹였다. 요리 중간에 막히는 부분은 서로 질문해가며 의견을 구했고 도움이 필요하면 망설임 없이 손을 거들었다. 손이 빠른 사람은 느린 사람을 기다려주며 그렇게 '함께' 밥을 지었다.

◇저마다의 '이야기'로 몸과 마음까지 '힐링'하는 1석 2조의 시간
/사진=루비마로 요리공방
/사진=루비마로 요리공방
자칫 음식물 쓰레기가 될 뻔했던 재료들이 집단 지성을 통해 응급처치를 받고 예쁜 접시에 담기니 그럴듯한 '요리'로 탄생했다. 와인과 촛불, 잔잔한 음악이 더해지니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 됐다. 전문가가 아니다보니 조리 시간이 길어져 저녁 9시가 넘어서야 식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차려진 음식들을 하나씩 맛보며 음식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자연스레 각자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강정화 대표는 요리하는 남자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를 화두로 꺼냈다. "지난 모임에 참가했던 한 남성분은 혼자 살다보니 생존을 위해 요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더라"며 "요즘 여자들이 요리를 잘 하지 않다보니 요리하는 남자들이 인기가 많은 것 같아 시작하게 됐다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식음료 영업일을 하고 있는 양회성씨 역시 '요리하는 남자'를 꿈꾸지만 이유는 조금 달랐다. "'여자가 집안에서 요리를 한다'는 일종의 고정관념이 많이 변하고 있다"며 "요리가 노동의 산물로 치부되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가정에서도 요리가 누군가 해야하는 '일'이 아닌 엄마 아빠 아이가 함께 즐겁게 할 수 있는 취미로 여겨지는 문화가 형성됐으면 한다"고 했다.

/사진=배영윤 기자, 루비마로 요리공방 제공
/사진=배영윤 기자, 루비마로 요리공방 제공
IT 업계에서 일하는 전경훈씨는 요리와 사람과 음악을 사랑한다고 했다. 전씨는 "어렸을 때 대학에 가면 친구들끼리 모여 맛있는 것을 먹으며 기타치고 노래부르는 분위기를 상상했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런 기회가 많지 않았다"며 "친구들은 물론 새로운 사람들과의 교감을 좋아해 이런 모임에 자주 참석하려 한다"고 웃음지었다. 그리고는 공방 한켠에 놓여있던 기타를 꺼내 연주하며 분위기를 돋웠다. 모두가 아는 곡들을 몇곡 연주해준 전씨 덕분에 자연스레 함께 노래를 부르며 한주 동안 지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힐링의 시간이 이어졌다.

음식에 관해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그것을 문화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소셜 문화가 범람하는 시대에 '먹는 것'을 통한 문화 모임인 '소셜다이닝'이야 말로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고차원적인 행위다.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될 음식을 나눠 먹고 거기에 추억과 즐거움까지 공유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사라져가는 현실 속에서 나와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인간적인 여유를 잊지 않을 수 있어 감사한 하루였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프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