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에게 '시간'은 적이 아니다

[MenzStyle] 패션은 자존심이다

아이스타일24 제공  |  2010.05.25 15:18  |  조회 15144
남자에게 '시간'은 적이 아니다

파리공항에서 밀라노행 비행기로 갈아타는 순간 가슴은 이미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밀라노에 다녀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길만 나서도 패션쇼, 사진기만 들이대면 화보’라며 요란을 떨곤 했다. 패션모델 뺨치는 조각 미모와 몸매의 남자들이 즐비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었다. 남성 스타일링에 몸을 담은 지 12년째. 드디어 세계에서 가장 멋진, 가장 멋을 잘 부리는 남자들이 모여 있다는 도시, 밀라노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내 가슴이 제자리에 붙어 있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밀라노는 과연 그랬다. 거기에는 수많은 패션잡지와 그 어떤 화려한 패션쇼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남성 패션의 신세계가 있었다. 마침 계절은 바람이 아직 차지 않은 절정의 가을. 도시의 멋쟁이들이 최고로 빛나는 때였다.

이태리 남자들, 특히 패션의 도시 밀라노의 젊은 남자들은 명성대로 잘생겼다. 나도 물론 밀라노에서 멋진 남자들을 많이 봤다. 하지만 내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꽃미남의 얼굴도 모델 같은 패션 감각도 아니었다. 배 나오고, 머리도 적당히 벗겨진 한국의 중년과 다를 바 없는 보통 남자들이었다. 늙으면 얼굴에 주름 생기고, 살찌고, 배 나오는 건 국경이 없었다. 똑같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기도 했다. 그들은 똑같이 머리 벗겨지고, 배가 나와도 멋있어 보였다. 먼 나라에 나와 있기 때문일까, 혹시 나도 서양인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던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지만, 달리 보려 해도 역시 그들은 멋졌다. 옆집에 사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은 인상의 시장통 식당 주방장일 뿐인데도 근사했다.
남자에게 '시간'은 적이 아니다

이태리 남자들은 도대체 왜 그렇게 멋져 보였던 걸까? 아무렇게나 걸친 카키색 바바리코트, 낡은 흔적이 역력한 가죽 가방, 염색하지 않은 희끗한 머리…. 어느 것 하나 눈에 쏙 들어오는 특별함은 없다.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 이유를 말해보라면 ‘그냥’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냥 멋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멋져 보이는 진짜 이유였다. 표정, 주름, 머리카락처럼 옷과 가방과 양말, 신발이 그 사람과 한 몸이 되어있었다. “넥타이색이 세련되다”, 혹은 “구두 정말 멋진데” 같은 것은 아마도 그들에겐 칭찬이 아닐 것이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무엇을 입었는지 미처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패션은 그들의 일부였다. 뜯어보면 볼수록 숨은 가치가 드러났다.

그레이 슈트에 멋들어지게 어울린 갈색구두, 복사뼈를 섹시하게 가린 바지 밑단과 그 아래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는 양말, 무엇보다 오십이 넘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초롱초롱한 눈빛. 돈으로 휘감은 명품 족이나 유행을 쫓기에 급급한 어설픈 멋쟁이에겐 느낄 수 없는 ‘패션의 품격’을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갈고 닦은 감각이었고, 오랫동안 꼼꼼히 보지 않으면 깜빡 속을 고수의 기법이었다.

내가 남성복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남성복은 입는 이의 내면을 꾸미지 않고 드러낸다. 사치스럽거나 요란한 장식은 필요 없다. 자신의 체형과 명예와 사상과 감정까지 남성복은 심플한 선과 면으로 표현한다. 남성들의 복장, 적어도 클래식 슈트의 세계에서 ‘시간’은 적이 아니다. 슈트의 오랜 역사처럼 오히려 슈트는 젊은이의 옷이라기보다는 세상과 인간과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성인을 위한 옷이다. 이태리 남자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몸에 익힌 패션에 대한 감각으로 그들은 눈으로 입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옷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름답게 드러냈다. 젊음이란 그 자체로 눈부시지만 시간이 쌓여야만 비로소 제 가치를 드러내는 중년의 멋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느낀 계기였다.

이태리 남성들을 떠올리다 한국의 중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너무 많은 의무 속에 자기 자신을 다 잃어버린 고개 숙인 뒷모습, 40대 사망률 세계 1위. 우울한 신문 기사의 한토막이 떠오를 뿐이다. 떠오르는 이미지는 적당히 몸을 가린 헐렁한 바지, 어깨선이 맞지 않아 처진 어깨를 더욱 처지게 하는 무거운 재킷, 구부정한 등에 소주잔을 들이키는 모습이다.

스타일링을 위해 중년 남성들을 만나면 대개 “나는 원래…” “내가 어떻게…”라는 말로 시작한다. 나는 원래 배가 나와서, 나는 원래 어깨가 쳐져서라고 지레 시도도 해보지 않는다. 쓸 돈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어떻게 옷 사는데 돈을 쓰나, 남자가 어떻게 옷을 고르러 다니나 같은 강박관념이다.

나는 멋진 옷, 외모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본능 중 하나로 생각한다. 나이가 든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남자라고 여자보다 관심이 덜하지 않다, 단지 사회적인 시선 때문에 숨겨두고 있을 뿐이다. 내가 알고 있는 대기업 중역인 K이사가 떠오른다. 그의 이야기는 두 번째 편에서 자세히 펼쳐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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