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헌신적으로 사랑했지만…"오빠는 그저 좋은 사람"

Style M  |  2015.03.12 10:03  |  조회 1105

[김정훈의 썸-39] 늙은 베르테르의 슬픔, 좋은 남자와 좋은 사람


썸. 묘한 단어가 등장했다. 짜릿한 흥분과 극도의 불안감이 공존하는 롤러코스터 마냥, 탈까 말까 망설여지기도 하고. 간질 간질. 정체를 알 수 없는 간지러움에 마냥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사랑만큼 떨리지만 이별보다 허무한 '썸'. 그리고 편식남 편식녀를 비롯한 그 밖의 다양한 '썸'에 대한 연애칼럼니스트 김정훈의 토킹 릴레이.


영화 '위대한 개츠비' 스틸컷/사진=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로테를 본 젊은 베르테르는 첫눈에 반해버리고 만다.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베르테르는 자신의 열렬한 사랑을 감히 드러낼 수가 없다. 그녀와 친분을 맺고 감정적인 교류를 나누는 관계가 되지만 베르테르가 걷고자 한 것은 외사랑의 길이었다. 로테에겐 이성적인 성격과 현실적인 능력을 갖춘 약혼자 알베르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넘어설 수 없는 현실의 장벽에 부닥친 베르테르는 한동안 로테의 곁을 떠나지만 감정을 추스르기는커녕 현실의 장벽을 오히려 더 실감하고야 만다. 평민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귀족들의 사교모임에서 소외되는 등 치욕적인 수모를 겪었다. 다시 돌아온 베르테르가 로테와 재회하게 됐을 때, 이미 그녀는 새로운 가정을 꾸미고 있었다. 로테의 따뜻한 보살핌은 그의 고독감을 더욱 깊게 한다. 베르테르는 모든 고뇌(슬픔으로 번역되긴 하지만 원제인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에서 'Leiden'은 슬픔보다 높은 차원의 '비참함'과 '괴로움'을 의미한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야 만다.


영화 '500일의 썸머' 스틸컷/사진=20세기폭스코리아(주)


후배 A는 최근에야 베르테르의 슬픔, 아니 고뇌를 체험한 인물이다. A는 첫눈에 반해버린 B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 늘 고민했다. 단도직입적으로 고백을 하라는 친구들의 조언은 A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꽤 낭만적이었던 그는 그녀가 자신의 운명의 여자라 생각했고(이 시점에서 많은 여성들은 A가 그저 B의 미모에 혹한 철없는 남자라고 비웃겠지만), 남들만큼의 만남과 이별을 겪어 본 A로서는 그녀에게만큼은 좀 더 신중하게 다가서고 싶었다.


A는 언제나 그녀의 일상에 관심을 가졌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의 편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그렇게 그는 그녀에게 '좋은 사람'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녀가 A에게서 수많은 공감대를 느낄 수 있었던 까닭은, 단지 우연처럼 취향이 너무나 잘 들어맞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 되고 싶었던 A는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녀를 만족시켜 주는 것 외엔 A의 머릿속엔 딱히 바랄 게 없었다.


자신의 울타리에 가둬놓으려 하지도, 삶이나 사랑의 방식을 주입시키기도 싫었다. A는 자신이 감히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좋은 남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자신이 없었던 A는, 우선 할 수 있는 '좋은 사람으로서 그녀를 무조건 행복하게 해주기' 만큼은 착실히 해내고 싶었다. 그 방법은 맹목적인 희생과 지속적인 관심, 배려와 이해였다. 그러한 덕목은 모든 여자들이 언제나 이야기하는 이상적인 사랑의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주변의 몇몇 여성들은 A에게 말했다. 지나치게 착하기만해서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남자는 섹시함이 없다고. 하지만 A는 그런 밀당이 본인이 생각하는 진짜 사랑의 법칙에 위배 된다고 생각했다. 좋은 남자와 좋은 사람의 차이가 무어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A는 그것에 대한 답을 할 수 없었다. 그 대답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 인정해 버린다면 더 비참해 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건 다름 아닌 베르테르가 느꼈던 현실의 높은 장벽과 다를 바가 없는, 경제적 능력과 그것으로 형성 된 사회 내에서의 신분에 관한 것들이었다.


누구보다 따뜻하고 진실된 사랑의 감정은 확실히 줄 자신이 있다. 사랑의 귀결점이 결혼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녀가 결혼을 하자고 하면 과연 당장이라도 진행할 준비가 돼 있는가? 무한대로 샘솟는 감정을 지속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경제적 여건은 제대로 마련돼 있는가? 그런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을 하기엔, A는 한 달 생계비 등 현실적 고민을 해결하기도 벅찬 평범한 월급쟁이였다. 그녀 역시 그와 딱히 다를 바가 없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지만, 그에게 그녀는 이미 자신과는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특별한 그녀를 특별하지 않은 세상에 끌어내리긴 싫었다.


영화 '봄날은 간다' 스틸컷/사진=시네마서비스


A도 몇 차례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마다 그녀는 말했다. 이렇게나 좋은 관계를 깨 버리게 되는 게 두렵다고. 너무나 좋은 사람이란 걸 알기 때문에 연애 같은 걸 해버려서 소중한 A를 잃어버리기 싫다고 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A는 혼란에 빠져 버린다. A가 B를 위해 맹렬히 감정을 쏟아 부었던 것은 연애라는 목표를 위해서였는데, 오히려 그 목표를 이루면 지금까지의 감정들이 하찮게 돼 버린다니. 그제서야 A는 후회가 된다. 지나치게 진정성을 어필한 자신의 모습, 자신이 갖고 있는 진실 된 감정에 있어 커플과 같은 관계의 껍데기는 굳이 중요한 게 아니라며 친구라도 괜찮다 했던 발언이 원망스럽다. A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로테와 마찬가지로, B에겐 남자친구가 있었다.


A보다 낭만적이진 않지만 현실적 능력을 갖춘 남자와의 연애를 포기 않으면서도 자신과의 감정적 유대감까지 놓지 않으려는 그녀 때문에, A가 자살을 결심하진 않았다. 다만 그의 순정만이 그날 이후 사라졌을 뿐이다. 이렇게 성장해 버린 늙은 베르테르들은 의외로 많다. 몇몇의 여성들은 그들의 실패 원인이 현실적인 문제가 아닌 괜한 자격지심이었다고 말한다.


/사진=Ktoine in Flickr 


하지만 또 다른 여성들은 단언한다. 여성이 "당신과 함께 있는 건 참 즐거워요.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겠구요. 하지만 사귀는 건 잘 모르겠어요"라고 이야기 한다면 그건 그냥 능력 없는 남자에게 상처를 덜 주기 위한 변명일 뿐이라는 거다. 오늘을 즐기고 싶은 좋은 사람과 내일을 함께하고 싶은 좋은 남자는 다르다고 못 박는다.


아무리 싱싱한 재료가 있어도 맛있는 레시피가 있어야 비로소 즐길만한 음식이 된다. 많은 남성들의 오류중 하나는, 여성들이 진정한 사랑을 받고 싶다고 말할 때 '그럴만한 사람에게서'라는 전제가 생략돼 있다는걸 눈치 못 챈다는 거다. '그럴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좋은 사람으로 우선 자리매김하려는 남자들도 많다. 극구 말리고 싶다. 굳이 그녀가 놓치기 싫어하는 '좋은 사람' '좋은 친구'란 존재를 만들어 내어 여성의 소유욕을 분산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친구란 존재가 상실된 공간까지 메울 정도의 더 강한 매력이 필요해진다.


후배 A의 마음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 그가 세상의 모든 베르테르들을 대신해 성공 했으면 한다. 더 이상 많은 남자들이 베르테르가 되길 자처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죽지도 못하고 순정만 잃어버린 늙은 베르테르가 되기 싫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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