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전해들은 내 남자의 과거…자꾸 신경쓰인다면?
[김정훈의 별의별 야식-4] 과일의 왕 두리안 - 개인의 취향과 타인의 의견
누구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면 좋을 것 같은 날, 마음껏 연애상담을 할 수 있는 편안한 술집이 있다면 어떨까? 공허한 마음과 몸을 채워 줄 요리, 만족스런 연애와 사랑을 위해 먹으면 좋은 음식은 뭐지? 남녀가 섹스 전과 후에 먹는 음식은? 이 모든 궁금증이 해결 되는 곳이 있다. 아무에게도 털어 놓지 못했던 은밀한 연애 이야기로 만들어진 맛있는 메뉴가 매주 채워지는 곳. 김정훈 연애칼럼니스트가 이 시대의 편식남·편식녀들에게 추천하는 힐링푸드, 별의별 야(한)식(탁)!
/사진=irrational_cat in Flickr
'맛은 당신의 것, 누군가의 입맛이 내 것이 될 순 없다'
너무 자신만만한 광고 같은 느낌이다.
'맛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혀에 휘둘리지 마세요'
이건 선거운동 느낌이고.
'맛 좀 봐라!!!' 이건... 패스...
고쳤다 지우길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전달하고 싶은 생각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요리는 하지 않고 뭘 하고 있었냐면 오픈 시간이 좀 남았기에 화장실에 붙여 놓을 인상적인 문구 한 줄을 만드는 중 이었다. 화장실의 청결도 향상을 위함은 아니었으므로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와 같은 문구는 생각 않기로 했다.
신체가 가장 집중을 하게 되는 배설의 순간에 역설적으로 생산적인 메시지를 심어주는 게 좋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느 건물 화장실에서 '하늘은 당신만이 할 일을 점지해 놓았다'는 탈무드 식 문장을 보며 감명을 받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연애상담을 해 주는 우리 가게의 특성을 살려야 하니 광범위한 삶을 아우르기 보다는 행복한 연애에 도움이 되는 문구가 필요했다. 본인의 연애에 대한 고민으로 음식이나 술을 먹던 손님이 아무생각 없이 들어간 화장실에서 '유레카!'하고 깨달음을 얻게 되는, 그런 문구라면 좋을 것 같았다.
/사진=syed_ikhwan in Flickr
그러다 지난주에 찾아온 대학교 후배가 생각났다. 두리안의 고약한 향 때문에 확실히 기억이 난다. 후배가 두리안을 들고 가게 문을 열었던 것은 아니다. 그 과일은 에피타이저 메뉴 추가를 강력히 어필했던 여자(후희를 모르는 남자를 특유의 찌푸린 인상으로 쳐다봤던 지난주 칼럼 말미에서 전희의 중요성을 운운하던 그 여자)가 놔두고 간 것이었다. 이게 그렇게 맛있을 수 없다며 에피타이저나 디저트를 만드는데 꼭 도움이 됐으면 좋겠단 의미로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감사하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은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난 두리안을 좋아하지 않는다. 식감이 월등하고 단백질 및 영양소가 풍부해 원기회복에도 도움을 주는 과일의 왕이라곤 하지만 그 특유의 냄새를 도무지 즐길 수가 없었다. 마음만 감사히 받고 두리안을 좋아하는 지인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계산을 마치고 나가던 그녀가 말했다. 다음에 방문했을 땐 두리안으로 만든 요리를 먹어보고 싶다고.
두리안 요리는 처음이라 코를 막고 심각하게 웹서핑을 하던 중 '두리안 크레페'의 레시피를 발견하게 됐다. 어쩔 수 없이 그걸 만들기 위해 몇 차례 시도해 보던 중 후배가 찾아온 것이다. 후배는 식당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두리안 냄새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대신 자신의 남자친구에 대한 문제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불과 보름 전의 연락에서도 별 문제없이 순탄한 연애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었던 후배였다.
"회사 선배가 그러는데, 제 남자친구가 예전에 진짜 많이 놀았던 날라리래요"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어? 꽤 오래 만났잖아. 요새 뭐 불편한 거라도 있었어?"
"아뇨. 그런 건 없어요. 근데 그런 과거가 있었다고 하면 앞으론 어떨지 모르겠어요. 저한테 보여준 것들이 사실은 진심이 아니라 요령들이었으면 어떻게 하죠? 헤어질까요?"
/사진=PersonalCreations.com in Flickr
"타인한테 전해들은 건 너가 확인한 진실이 아니잖아.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검증되지 않은 과거 얘기 때문에 만족스런 현재를 부정할 필욘 없지. 네가 알기 전 그의 과거에 대해선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 너희가 만난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이 앞으로 살아갈 세계의 역사가 시작되는 거라고 생각해야해. 맞다. 전에도 이야기 했었지? 조언하는 선배가 남자라면 너한테 관심이 있을지도 모르니 괜히 연애 고민 상담 같은 건 다른 남자한테 하는 게 아니라고. 여자 선배라고 해도 마찬가지야. 네 핑크빛 연애에 질투를 하고 있을 수도 있거든. 엄청 드물긴 하지만, 네 남자친구에게 관심이 있었다거나 그런 비슷한 사람에게 한 번 상처를 받았던 사람일 수도 있고"
연인들의 문제는 타인의 눈과 귀가 아닌 둘의 힘으로 해결하면 되는 거라는 결론으로 마무리 지으려는데 후배의 눈동자가 여전히 불안해 보였다.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했다. 본인이 확신하고 있던 진실도 주위의 의견 때문에 흔들리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다. 하물며 본인에게 확신이 없었다면 그 흔들림이야 오죽할까. 후배는 예전부터 귀가 얇고 주변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는 타입이었다. 후배 뿐만이 아니다. 요즘 들어 개인의 취향에 확신이 없는 사람을 종종 발견한다.
SNS를 비롯한 인터넷매체가 이 문제를 더 심화시키는 듯하다. 본인보단 타인의 취향을 관찰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자랑하듯 게재한 본인의 취향에 '좋아요'가 부족하면 그걸 도로 숨겨버리기까지 한다. 나의 위시리스트는 타인의 위시리스트와 별반 다를 게 없어졌다. 맛집에 대한 평가가 대표적이다. 새로운 레스토랑에서 처음 먹어보는 음식을 맛 봤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의 미소를 저절로 만들어 내는 맛은 분명히 아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이게 무슨 맛이지? 내가 좋아하는 맛인가?'라는 의문을 던지면 다행이다. 검색으로 도출된 다량의 블로그 포스팅과 그에 준하는 긴 대기행렬을 보며 '내가 맛을 모르는가보다.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이건 맛있는 맛 인거구나'하고 단정지어 버리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게 문제다. '맛있는 맛인 거구나!'라니. 이런 판단이 연애에도 똑같이 적용되면 안 된다.
/사진=CarbonNYC [in SF!] in Flickr
"사랑을 정보로 하는 건 아니잖아. 1차적인 정보도 아니고 누군가를 거쳐 온 간접적인 정보일 경우는 더 그렇지. 그럴싸한 사람과 보기 좋은 연애를 하려는 것도 우스꽝스럽고. 그를 사랑하는 건 너 자신이야. 그가 네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이 많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 눈앞에 그가 서 있다면, 제대로 눈을 떠서 그를 볼 수 있는 건 결국 너 밖에 없어. 굳이 눈을 닫고 귀만 쫑긋 세우면 안 돼. 그럼 귀가 더 예민해져서 필터 없이 타인의 의견을 듣게 되거든. 남 의견이야 본인이 컨트롤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선택적으로 수용하면 되는 거고"라며 말을 하는 사이 맛있게 두리안을 먹고 있는 후배가 보였다. 크레페도 맛이 괜찮다고 했다. 실컷 조언을 하고 난 터라 나 역시 억지로 한 입을 먹어야 했다. 만들어 놓은 음식이 눈앞에 있으니 입을 열고 그 맛을 봐야했으니까. 윽. 후배에게 당당히 말했다. "이걸 어떻게 먹어?"
후배와의 일화를 떠올리자 화장실에 들어갈 문구가 떠올랐다. 가게 오픈 시간이 다가와 대충 휘갈겨 썼다. 좀 야하긴 한 것 같은데...불만사항이 접수되면 바꿔 버리면 되니 부담은 갖지 않기로 했다. 오늘부터 방문한 손님들이 화장실 문을 여닫을 때 보게 될 문구는 이거다.
'당신과 연인의 혀.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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