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도 없이 어떻게 결혼을"…집없는 '민달팽이남' 싫다고?
[김정훈의 별의별 야식-10] 달팽이요리 '에스카르고' - 느리다고 사랑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누구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면 좋을 것 같은 날, 마음껏 연애상담을 할 수 있는 편안한 술집이 있다면 어떨까? 공허한 마음과 몸을 채워 줄 요리, 만족스런 연애와 사랑을 위해 먹으면 좋은 음식은 뭐지? 남녀가 섹스 전과 후에 먹는 음식은? 이 모든 궁금증이 해결 되는 곳이 있다. 아무에게도 털어 놓지 못했던 은밀한 연애 이야기로 만들어진 맛있는 메뉴가 매주 채워지는 곳. 김정훈 연애칼럼니스트가 이 시대의 편식남·편식녀들에게 추천하는 힐링푸드, 별의별 야(한)식(탁)!
/사진=Natasha_D'Souza in Flickr
느린 달팽이의 사랑. 대학시절 인기 있던 카페의 이름이다. 사실 그곳은 카페보단 티룸(Tea-Room)에 더 가까웠다. 다양한 브랜드의 각종 Tea들은 물론 스콘과 마들렌, 크로아상 등이 곁들여진 애프터눈 세트까지 갖추고 있었으니까.
처음 그곳을 방문했을 때가 생각난다. 주문을 했더니 싱크대 개수구멍에서 볼 법한 묘한 모양의 철망과 과학실에서 막 가져온 것 같은 유리 티포트를 주는 게 아닌가. '이걸 어떻게 먹으라는 거지?'하는 고민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동행한 선배 누나가 우아하게 티를 우려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색무취의 물은 쌉싸름한 홍차로 인해 천천히 붉게 물들고 있었고, 선이 고운 누나의 옆모습을 힐끔거리는 내 볼도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 느린 달팽이의 사랑. 천천히 라도 좋으니 이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단 생각을 하면서.
갑자기 웬 추억 팔이냐고? 추억속의 누나가 가게를 방문해서도, 질 좋은 티가 들어와서도 아니다. 그 이유는. 아, 잠깐만. 고함을 지르며 날 찾는 여자 손님에게 가봐야겠다. 생맥주 4잔과 순하리 소주 3병을 한 시간 만에 비워낸 테이블이다.
"집이 왜 없웡! 집! 아저쓀! 왜 여기 집이 없쉉요? 달팽이집 어디갔엉용. 달퓅이집."
"아, 죄송해요. 먹기 편하시라고 집은 제거하고 크림에 버무려 본 거거든요."
꼬부라진 혀로 불만을 제기하고 있는 손님 앞에 놓인 에스카르고. 이 달팽이 요리 때문에 지난 추억이 잠시 생각난 거다. 에스카르고는 와인과 맥주 모두와 어울리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요리다. 씹는 맛이 골뱅이와 비슷해 소주와도 어울린다. 에스카르고는 와인·양파·향초(香草)등과 함께 끓여낸 달팽이의 살을 버터와 레몬즙, 파슬리 다진 것을 섞은 소스와 함께 껍데기에 채워 오븐에 구워 내는 게 보통이다. 난 손님의 편의를 위해(사실 살을 발라내는 도구를 내놓는 것도 좀 귀찮고)껍데기를 제거한 뒤 바질크림소스에 버무린 살을 빵과 함께 준비해봤다. 그런데 맛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달팽이집을 제거했다고 불만이라니. 이런.
영화 '티끌모아 로맨스' 스틸컷/사진=필라멘트 픽쳐스
그때였다. 주방에 있던 소이가 달팽이집이 가득한 보울을 한 손에 들고 테이블을 향해 걸어왔다. 아, 함께 일하기로 한 아르바이트생을 '이번주엔' 소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왜 이번주 만이냐고? 어차피 본명을 가르쳐 주지도 않을 건데 내키는 이름으로 부르는 게 더 재밌을 거란 게 소이의 제안이었다. 그리곤 근육량을 늘리느라 필라테스에 열중하고 있는 이번 주는 소이단백질을 많이 섭취하고 있으니 소이라고 불러 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럼 필라나 테스라고 부르면 안 되냐고 물으니 그건 또 완강히 거부를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지금 성큼성큼 걸어온 소이는 손에 들고 있던 보울을 손님의 테이블에 탕하고 던지려다 내 눈치를 잠시 보곤 다시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리곤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어쩌라고. 방금 전까지 고함을 지르던 긴 생머리의 여자는 달팽이집을 보고선 행복한 미소를 잠시 짓더니 다시 침울한 표정으로 바뀌어선 맥주를 한 잔 추가하는 것이었다. 주방으로 가려는 소이에게 그녀가 물었다.
"집은 집인데 집이 없어서 가기 싫어지는 집이 뭔 줄 아세요?(술에 취해 혀가 꼬인 상태로 말한 것을 제대로 번역했다)"
"시집."
질문과 동시에 소이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순간 정적. 소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묵 속을 빠져나가 버렸다. 맥주를 가져오는 소이를 쳐다보던 생머리 여자는 다시 에스카르고 껍데기에 시선을 돌려 그것들을 포크로 툭툭 치기 시작했다.
"얜 좋겠다. 태어날 때부터 집이 있어서. 우리 오빠는 이런 맛있는 달팽이가 아니에요. 민달팽이남(男)이에요 민달팽이. 불쌍하죠. 우리 민달팽이 신랑님."
"죄송해요. 친구가 술을 많이 마셔서."
화장실에서 돌아오던 그녀의 친구가 미안한 듯 사과를 했다. 나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내용은 심플했다. 의지는 있으나 돈이 없는 남자와의 결혼준비. 본인이 경제적인 부담을 훨씬 더 많이 해서 결혼하긴 싫은 여자의 자존심. 그 자존심을 내려놓으라고 그녀의 친구는 조언했지만 생머리녀의 마음고생은 생각보다 심했다. '나를 사랑한다면서 집도 준비하지 않은 민달팽이 오빠와 마냥 행복한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괴롭단다. 민달팽이 신랑이라. 뭔가 씁쓸해졌다. 소금을 뿌리면 금방이라도 녹아 없어지는 민달팽이가 꾸역꾸역 기어가는 모습이 상상돼 버렸달까.
영화 '티끌모아 로맨스' 스틸컷/사진=필라멘트 픽쳐스
"저도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어요. 그게 언젠 줄 알아요?" 그녀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언젠가 그녀의 집에 놀러갔던 지극히 평범한 저녁이었어요. 그녀가 만들어준 밥을 먹고 나는 설거지를 하고. 그녀가 늘 듣는 음악리스트를 함께 듣고 우리는 함께 만화책을 봤죠. 그러다 재밌는 TV토크쇼를 보며 함께 웃었고, 문득 그녀가 너무 예뻐 보여 키스를 했어요. 그리고 다시 전 의자에 앉았고 그녀는 침대에 엎드렸어요. 그리곤 각자의 노트북으로 과제를 하는데 갑자기 그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서로의 일상에, 인생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기분? 그게 전혀 거북하지 않고 너무나 반가울 때. 그 평범함이 너무나 특별하단 생각이 들 때. 그 소중함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결혼생각이 났어요." 그녀들은 깊은 공감을 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소이까지.
"근데 제가 느꼈던 그 소중한 순간은 둘 만의 공간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죠. 기왕이면 넓으면 더 좋고, 월세가 아닌 전세, 전세보단 자가 소유면 더 좋겠죠. 하지만 그런 건 정말로 '더' 좋아지는 기준일 뿐이에요.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게 가장 중요하잖아요?" 생머리녀는 조금 부끄러운 듯 친구를 쳐다봤다.
"연애할 땐 본인이 할 수 없는 것들을 무리해서라도 해주려 해요. 혼자서 그 무리를 감당해 보는 노력을 사랑이라고 믿죠. 받는 쪽도 그런 무리는 싫다고 하면서 은근히 바라게 돼고요. 그런데 결혼준비 과정에서까지 그 무리가 이어지면 안 될 거 같아요. 앞으로 마주할 수많은 무리들을 함께 하기로 하는 결혼이란 걸 준비하는 두 사람이잖아요. 내 사랑을 설득하기 위해 굳이 혼자서 그것들을 짊어지려는 것도, 그걸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도 좋지 않아요. 집이든 뭐든."
"그래야 결혼생활 안 피곤해져요. 남편한테 당당하게 잔소리 하려면 지금 좀 불편하더라도 경제적인 부담을 똑같이 져서 준비하는 게 좋다니까요." 소이가 내 말을 거들었다.
달팽이는 동면에 들어가기 직전의 것이 맛과 영양이 가장 좋다. 결혼을 준비하는 연인들도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남들보다 느리다고 해서, 태어날 때부터 민달팽이라고 해서 사랑을 지속시킬 수 없는 건 아니다. 언젠가 달팽이의 짝짓기 과정을 본 적이 있다. 둘은 그저 함께 꼭 붙어 있는 채로 몇 시간씩 움직이지 않는다. 꽤 끈적끈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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