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친 위해 적금까지 깬 남자…통장잔고도, 사랑도 '제로'
[김정훈의 '없는 남자'-2] 잔고 없는 남자 - 돈도, 감정도 현명하게 소비하는 법을 익혀야
오프라인이고 온라인이고 남자들이 문제란다. 오프라인에선 소극적인 남자들을 향한 여성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온라인에선 남성들의 전투적인 악플이 연애와 사랑의 근간을 후벼판다. 왜 이렇게 까다로운지, 왜 그리 불만이 많은지. 결핍 있는 남자들의 현실을 제대로 들춰주는 'OO 없는' 남자 이야기.
영화 '커플즈' 스틸컷/사진=싸이더스 픽쳐스
며칠 전 술자리에서, 지난주 칼럼을 읽은 여성들이 피드백을 줬다.
"여자들이 얘기하는 돈 없는 남자의 정의란 절대적인 재산의 유무가 아니에요."
"맞아. 그렇게 일차원적으로 남자를 평가하는 'XX녀'들은 우리들 사이에서도 별로거든. 물론 능력이 없다고 여겨지면 기피하긴 하지만."
"돈 없는 남자보다 더 안타까운 남자는 따로 있지. 돈을 제대로 쓰는 요령이 없는 남자."
듣고 있던 남자 지인은 '돈이 있어야 돈을 잘 쓰는 거잖아!'라고 외쳤다. 여성들은 다시 반박했다. 생계유지조차 하기 힘들다면 연애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적정수준만 충족되면 그 이상으로 부유한 남자보단 센스 있게 돈을 쓰는 남자가 인기 있다고. 이 때 잘 쓴다는 건 자주 쓰는 '빈도'가 아닌 적재적소에 요령껏 쓰는 '기술'임을 강조했다.
"그 적정수준이 애매하잖아. 나름대로 노력하는데도 가난에서 못 빠져나오면 연애도 할 수 없단 얘기야? 어쨌거나 자주, 또 많이 써야 돈 쓰는 요령을 보여줄 수도 있는 거고."
그는 조금 흥분하며 반론을 펼쳤다. 분위기는 결코 그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나름대로'라는 말의 정의가 애매한 것이었고 그는 그녀들에 비해 연애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다. 여성들이 떠난 뒤 그와 함께 자리를 옮겨 술을 더 마셨다. 그는 몇 시간 전의 언행에 대해 자신의 자격지심이 발동한 거라며 쓴 소주를 들이켰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란 말. 그게 참 어렵다? 개같이 벌면 개같이 쓰고 정승같이 벌면 정승같이 쓰게 되는 경우가 더 많거든. 그래서 사람들은 애초에 정승인 배우자를 더 선호하게 돼 있어. 난 태어날 때부터 정승이 아니잖냐. 물론 개도 아니지만. 그냥 평민같이 벌어서 평민같이 썼어. 그런데 내가 만난 여자는 늘 정승만 만나왔던 게 문제였지."
영화 '커플즈' 스틸컷/사진=싸이더스 픽쳐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다리가 찢어진다. 그런데 사랑에 빠진 뱁새는 본인의 다리가 찢어지는 줄도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연애비화 역시 그런 것들이었다. 그는 대단히 많은 연봉은 아니었지만 혼자선 나름대로 먹고 살만한, 소위 말하는 생계유지형 월급쟁이였다. 성실한 친구였고 위트도 있었다. 외모도 나쁘지 않았다. 연애경험이 전무한 모태솔로는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에 비해 적극적인 구애활동을 펼치지 않았을 뿐이다. 그에게 연애는 사치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반해 먼저 고백해 온 여자 동기가 있었다.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대해온 그는 사랑도 성실하게 했다. 하지만 경제적인 여건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풍족한 자산이 없다는 게 문제의 발단은 아니었다. 여자도 그걸 알고 연애를 시작했으니까.
그는 열심히 번 돈을 고스란히 그녀와의 데이트를 위해 써야했다. 솔로일 때와 같이 저금을 할 수는 없었다. 월급은 정해져 있었지만 그녀에게 해 주고 싶은 건 점점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 역시 받기만 하진 않았다. 7대 3정도의 데이트 비용 부담 수준을 유지했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으므로 그 비율이 전혀 상관없었지만, 그게 더치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본인이 다른 여자들에 비해 꽤 충실히 더치페이를 하고 있다 생각했다.
그녀는 가끔 주변 친구들의 연애에 대해 이야기했다. 장난처럼 과거의 연애를 언급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물질적으론 예전 연애가 풍족했을지 몰라도, 지금 난 감정적으로 충만해서 너무 행복해.'라는 그녀의 말이 석연치 않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5대 5, 아니 그 이상의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그렇게 부족했나?' 그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 밖에 없었다. 큰 거 한 방이 없었구나!
영화 '커플즈' 스틸컷/사진=싸이더스 픽쳐스
그녀는 꽤 예뻤고 풍족한 남자들을 만나왔다. 옛 남자친구들은 돈을 잘 썼다. 돈을 잘 쓰는 기준은 큰 돈을 쓸 때 결정된다. 자잘한 소비를 아무리 많이 해도 돈을 잘 쓴다는 인식을 줄 순 없다. 상대의 소비 수준 역시 그만큼은 되기에 자극의 역치를 부합시킬 수 없는 거다. 그는 결국 원칙을 깼다. 적금통장도 깼다. 그녀에겐 당연히 비밀로 했다. 성과급이 꽤 나왔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행복해 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는 게 좋았던 그는 점점 더 무리를 했다. 우화에 나오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았다. 그의 노력은 예전과 다름없었지만 통장의 잔고는 점점 바닥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녀도 그걸 어느 정도 눈치 챘다. 그의 통장은 화수분이 아니었고 그녀는 불안해졌다. 그 역시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점점 예민해졌다. 본인의 무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때로는 미래의 불안정함에 대해 얘기하는 그녀의 모습에 서운함이 생겨버렸다. 통장 잔고가 거의 0원이 됐을 때, 남아 있는 둘의 감정 역시 제로가 됐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어떻게 넌 그럴 수 있어?"
"언제 그렇게까지 해 달랬어? 그리고 뭘 그렇게 대단한 걸 해줬다고 그래?"
영화 '커플즈' 스틸컷/사진=싸이더스 픽쳐스
안타까웠다.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 물가가 상승하고, 가치가 오르면 물가가 하락하는 시장원리가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었다. 같은 돈을 쓴다 해도 여유가 있는 남자와 그렇지 않은 남자에겐 큰 차이가 있다. 없는 상황에 돈을 쓰게 되면 그 돈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니 지갑을 아무렇지 않게 여는 남자보다 본인의 감정이 훨씬 더 크다고 자부한다. 그게 발목을 잡는다. 그 특별함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대에게 억하심정을 갖게 된다. 이때 남성들은 무작정 여성을 탓해선 안 된다. 해주는 즐거움에 취한 본인의 책임도 분명히 있는 거니까.
여성들도 행복한 연애를 위해 알아야 할 게 있다. 남성들이 돈과 관련해 느끼는 3가지 종류의 상실감, 즉 자존심·미안함·억울함의 감정이다. 돈 많은 주변 남자들과 은연중에 비교당하는 자존심, 사랑하는 그녀에게 더 좋은걸 못해주는 미안함, 그리고 돈을 써 놓고도 인정받지 못하는 억울함이 그것이다. 지나치게 더치페이를 주장하는 남자도 멋이 없지만, 남자가 조금 더 무리하는 데이트 비용에 대해 지나치게 당연하다 생각하는 여자도 배려부족이다. 진짜 여우는 그런 걸 잘 컨트롤해 남자의 헌신을 더 이끌어 낸다고 하니 참고해도 좋을 것 같다.
사랑하는 감정을 생산하게 만드는 것이 연애라지만 그런 감정과 돈을 소비해야 하는 것 역시 연애다. 생산의 연애도 중요하지만 소비의 연애 역시 중요하다. 현명하게 소비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돈도 감정도 마찬가지로. 주는 쪽 받는 쪽도 모두. 형편에 맞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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