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귈줄 알고 밤을 보낸 그녀, 스킨십 후 발뺌하는 썸남

Style M  |  2014.11.16 11:11  |  조회 1111

[김정훈의 썸⑳]썸은 미화된 엔조이일 뿐이다


썸. 묘한 단어가 등장했다. 짜릿한 흥분과 극도의 불안감이 공존하는 롤러코스터 마냥, 탈까 말까 망설여지기도 하고. 간질 간질. 정체를 알 수 없는 간지러움에 마냥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사랑만큼 떨리지만 이별보다 허무한 '썸'. 그리고 편식남 편식녀를 비롯한 그 밖의 다양한 '썸'에 대한 연애칼럼니스트 김정훈의 토킹 릴레이



영화 '비긴 어게인' 스틸컷/사진=판씨네마(주)


이렇게 바람이 좋은날엔 테라스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맥주를 마시고 싶다. 담요 하나 들고 한강에 가서 높은 하늘과 햇살을 마음껏 즐기며 뒹굴고도 싶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 좋을 것이다.

"회사 점심시간에 밥 먹고 들어가는데 날씨가 정말 좋은 거예요. 이런 날엔 정말 혼자이고 싶지 않아요. 얼마나 외로움이 사무쳤으면 눈앞에 있는 가로수 기둥을 꼭 껴안고 싶었다니까요." 한 지인이 털어놓은 말에 사실은 은근한 공감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가로수가 듬직한 남자의 등으로 보였을까. 사람이 외로워질 땐 평상시 생각하지 않던 다양한 의미들이 한 번에 유입된다. 사물을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응시하기 때문이다.

눈이 열리고 귀가 뚫리면서 평소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도 들린다. 세상 모든 사물들이 의미를 갖고 나아가 나의 존재와 삶의 의미까지 생각한다. 그렇게 가을은 모두를 예술가로 만든다. 최근 흥행영화 '비긴 어게인(2014)' 속 주인공 댄(마크 러팔로 분)은 술에 취해야만 노래의 반주가 들린다고 했는데 요즘 같이 좋은 날엔 굳이 술에 취하지 않아도 세상의 다양한 반주들이 들려온다. 그래서 그 아름다운 음악을 함께 듣고 싶은 이가 있었으면 싶다. 그때 떠오르는 사람, 하지만 연인은 아닌 바로 그 사람을 우리는 '썸남썸녀'라고 부른다.



인파속을 함께 걷고 있는 사람이 이리저리 치이는 게 걱정돼서 손이라도 잡아야 할 것 같다면 그건 썸타는 관계 아닐까? 무수히 지나치는 사람들 혹은 그 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는 사람'과는 다르다. 곁에 두고 놓치고 싶지 않다. 무채색 사람들 속 색채를 갖고 있는 이성을 만난 기쁨은 대단히 크다. 그래서 '내 꺼인 듯, 내 꺼 아닌, 내 꺼 같은' 관계라도 좋으니 제발 썸이라도 타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큰일 날 소리다. 사랑을 하려는 게 문제는 아니지만 '썸'이라는 관계를 당연시하면 안 된다. 썸은 합리적인 엔조이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육체적·정신적인 엔조이가 미화된 개념이 썸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썸 타는 관계의 긍정적인 면만 다분히 보여줬을 뿐이다.

물론 연애 전 상대방을 알아가며 두근거리는 기간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이 기간을 '썸'으로 개념화하면 적잖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이 남자는 왜 썸만 타고 있는 거죠?" "데이트도 하고 스킨십도 하는데 고백은 안하는 사람을 계속 만나도 될까요"라는 질문들이 쏟아지는 이유다.

연인이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져야 할 시간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나도 괜찮은 시간'이라는 합리화로 변질 돼 버렸다. 제대로 연애 하고 싶은 사람이 썸 타는 기간을 길게 가지고 싶을 리는 없다. 오히려 그 기간을 줄이려 애쓴다. 당신 곁의 남자(혹은 여자)가 썸을 오래 타려 한다면 그건 어떤 의미로든 빨리 끊어내야 할 사람이다. 어장관리를 하고 있는 왕자님이든, 당신을 확실히 책임질 자신이 없는 겁쟁이든 둘 중의 하나기 때문이다.


썸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엔 확실한 책임감 없이 이 사람 저 사람 간만 보는 행동에 대해 무차별적인 질타가 이어졌다. 하지만 썸의 등장 이후 이처럼 무책임한 행동이 당연시 여겨지고 있다. 그들은 "아직 사귀진 않잖아"라는 변명으로 여러 명의 이성을 동시에 만난다. 이 사람에게 감정을 주면서도 저 사람과 감정을 쌓을 여지를 얼마든지 남겨 놓는다. 관계에 대한 책임감은 상대에게 관심을 표하고 데이트에 준하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분명히 존재해야 한다.

굳이 연애를 시작하자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스며드는 연애의 감정을 책임지려는 자세는 중요하다. 데이트할 때엔 희망적인 내일을 함께 할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다가 은근슬쩍 발을 빼 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도대체 썸과 연애의 경계는 어디야?"라는 질문이 그래서 생긴다. 이건 "사귀자. 오늘부터 1일!"이라는 우리나라만의 특이한 연애 스타일이 주는 문제점이다. 사귀자는 말이 있어야 연인관계가 시작된다는 건 그 관계의 형태를 확실히 해준다는 장점은 있다. 그런데 감정이 쌓인 상태라 해도 그러한 규정 없인 아무 관계가 아니라고 치부하는 건 문제가 있다. 서로의 감정에 무책임한 행동이다.

은근슬쩍 발뺌하는 사람들은 관계의 즐거움만 취하려 하는 경우가 많다. 희로애락의 감정에서 귀찮고 불편한 것들은 외면하려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썸 타는 관계'는 상당히 즐겁다. 연애를 할 때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면서도 스트레스는 전혀 받지 않아도 되니까. '우리'라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나'만 생각하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이 내 감정만 우선시 하는 관계를 즐기는 건 당사자에게도 좋지 않다는 걸 명심하자. 즐거움만 탐하려다 혼자서 늙어 가는 노총각 노처녀를 여럿 봤다. 노력 없이 얻는 일확천금은 순식간에 거덜 나버린다. 관계에 있어서 졸부가 되면 안 된다.

유희적 만남이 육체적 엔조이 단계로 접어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나는 그 사람을 좋아했으니까, 사귈 줄 알고 잔건데요?"라는 말을 해 봤자 소용이 없다. 스킨십 이후 무책임한 행동을 보이는 그가 당신의 속내를 완벽히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귀지 않더라도 섹스를 할 수 있단 생각에 당신도 동의를 한 것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 남자(여자)가 사귈 것 같이 행동한다는 건 순전한 당신의 판단이다. 생각 없이 결혼이야기를 꺼내는 사람, 아무렇지 않게 명품 선물을 하는 사람, 그냥 스스로에 취해 이벤트를 벌이는 사람 등 종류는 다양하다.

상처를 받지 않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당신이 관계의 형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스킨십의 진도 역시 무조건 그 형태에 맞춰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현재 즐긴 스킨십을 관계의 형태와 연관 짓지 않으면 된다. 당신도 '사귈 줄 알고' 스킨십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지금 좋으니까' 하면 되는 거다. 현재의 기분만 생각하는 쾌락주의자에게 맞서는 방법은 그런 사람을 만나지 않거나 똑같은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다.

우선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확인부터 하자. 당신을 그저 아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는지, 연애를 하기 위한 썸 단계인지 엔조이 관계일 뿐인지에 대한 확인을 하는 방법을 다음 주에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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