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먹고 전화하는 남자들, '취중진담'일까 '취중진상'일까
Style M | 2014.11.27 03:11 | 조회 1564
[김정훈의 썸㉖] 취중 얘기가 '진심'인지 '진상'인지 판단하는 건 개인의 감정에 기인한다
썸. 묘한 단어가 등장했다. 짜릿한 흥분과 극도의 불안감이 공존하는 롤러코스터 마냥, 탈까 말까 망설여지기도 하고. 간질 간질. 정체를 알 수 없는 간지러움에 마냥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사랑만큼 떨리지만 이별보다 허무한 '썸'. 그리고 편식남 편식녀를 비롯한 그 밖의 다양한 '썸'에 대한 연애칼럼니스트 김정훈의 토킹 릴레이.
영화 '우리 선희' 스틸컷/사진=(주) 영화제작전원사 , (주) 영화사조제
전람회 노래는 잘 모르지만 김동률은 안다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조금 더 지식을 뽐내 보기로 한다. "원래 '취중진담'이란 노래는 1996년 발매된 전람회 2집, Exhibition에 수록돼 있어. 그 앨범 되게 좋다?" 우쭐한 표정으로 리액션을 기다리는 남자에게 의뭉스런 표정의 여자가 묻는다. "근데 지금 하는 얘기 저한테 한 번 했던 거 알아요? 예전에 저한테 술 먹고 했던 말들은 다 진짜예요?"
보고 싶다. 네가 내 이상형이다. 취중진담일까 취중진상일까?
물론 진심이긴 하다. 다만 대세에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진심의 파편일 뿐이다. 당신이 신경을 써야할 건 진심의 질 뿐만 아니라 양도 포함된다. 술에 취해 '뭐해?'라고 연락 해오는 남자. 그 순간엔 진심으로 당신의 일상을 궁금해 할 수 있다. 하지만 고작 하루 중 2분 정도의 진심이다. 그가 그런 연락을 한 달간 매일 반복한다 해도 겨우 60분을 채울 뿐이다. 그렇게 1년이 흘러봤자 12시간이다.
1년 중 하루치도 안 되는 진심으로 당신을 대하는 이성을 만날 필욘 없다. 헤어진 연인이 전화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당신을 보고 싶어할 때의 마음은 진짜지만 그 진심이 내일까지 이어나갈 수 있냐는 확신을 물어본다면 글쎄다. 이후에 외면할 수도 있을 진심이라면 순간의 진정성 여부가 그리 중요할까 싶다.
취중진상의 원인. 술은 흥분제가 아닌 억제제다
목소리가 커지고 평상시 하지 않던 과격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술이 흥분제라 생각하면 안 된다. 술은 신경계에 억제제로 작용한다. 다만 인간의 두뇌체계 중에서 논리적 사고를 담당하는 부분이 가장 먼저 억제되어버리기 때문에 흥분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스스로를 제어할 브레이크와 평정심을 잃어버린 사람은 잘못에 대해 옳고 그름을 생각할 능력이 떨어진다. 하고 싶었던 얘기를 하기 위해 술의 힘을 빌리는 아름다운 취중진담은 술이 흥분제일 경우에나 가능하다. 술은 억제제이므로 좋아한다는 표현에 따르는 책임감과 그것을 짊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 사귀지 않은 상태에선 스킨십을 하면 안 된다는 도덕심 등을 억제시킨다.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말을 함부로 하게 만드는 게 술이다.
누구나 어릴 적엔 아름다운 취중진담에 대한 경험이 있을 거다. 상대에게 관심이 있지만 고백을 망설이는 프로세싱이 현재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 옛날엔, 나보다 그 사람의 행복을 먼저 생각했다. 내가 그 사람의 곁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이유가 떠올라 좀 더 완벽한 나로서 상대에게 다가가기 위해 망설였다. 그러다 술의 힘을 빌려, 복잡한 생각들을 억제시키곤 조심스레 마음을 전달할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고.
낭만을 잃어가고 현실적인 선택이 잦아진 요즘엔 그 행복의 중심이 자신인 경우가 많다. 내가 그 사람의 곁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 보단 상대가 내 옆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를 먼저 떠올린다. 그런 부정적 요인들로 인해 고백은 미뤄진다. 결국 술에 취한다 해도 이기심이 남는다.
보고 싶다. 자고 싶다. 조심스런 감정보단 직접적인 언어를 전달한다. 미래를 책임질 순 없지만 당장 교감하고 싶다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한다. 상대의 감정에 대한 책임은 지지 못하고 개인의 행복을 쟁취하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 당신의 무책임함을 나무라는 상대의 야단에 '그 순간은 진심이었다'며 합리화 시키기까지 한다.
여전히 낭만주의를 자처하는 남자들도 많다. 술을 먹기만 하면 당신이 사무치게 그리워질 수도 있고, 그래서 일부러 술을 먹는 남자도 있다. 눈치만 보다가 겨우겨우 감정을 드러내는 이런 남자들은 애초에 당신을 불안하게 하지 않을 것 같다. 평소에도 진심을 드러내는 행동을 할 게 뻔하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건, 이들같이 연애 전 감정을 과하게 드러내는 남자들이 섹시하지 않거나 재미가 없다며 외면하는 여성들도 꽤 많다는 사실이다.
친구들과 술자리에 불러낸 그. 나를 진짜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닐까?
좀더 업그레이드된 취중진상은 친구들과 노는 술자리에 불러내는 행동이다. 사귀자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친구들에게 소개를 시키는 남자. 그의 친구들 역시 당신에게 남자의 칭찬을 늘어놓는다. 이때 대부분의 여자들은 생각한다. '친구를 소개시켜줄 정도면 내게 호감이 있단 거구나. 친구들이 이렇게 인정하는 남자라면 괜찮지 않을까?'
지나치게 어둡고 시끄러운 클럽과 같은 공간이 아닌, 놀이보단 대화에 집중할 수 있는 술자리라면 스스로의 감정에 확신이 없는 남자가 주변인들의 평가를 얻기 위해 당신을 불러냈을 수도 있다. 그런 자리가 아니면 당신이 그 자리에 불려 나온 이유는 둘 중 하나다. 당신이 매력적인 외모를 갖고 있거나, 혹은 예쁜 친구를 많이 알고 있을 것 같거나.
그저 놀기 위해 당신을 불러낸 그의 진심을 파악하려 하지말자. 연인 관계를 확실히 증명하는 말과 행동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당신도 그냥 그 자리를 즐기면 그만이다. 이런 취중진상의 주체가 여자일 경우엔 더 다양한 만행이 벌어진다. 달콤한 말들로 남자를 꼬드겨 계산까지 시켜버리곤 하니까.
진심이 궁금하다면 극도의 만취상태를 만들어 보는 건 시도할 법하다. 술에 취해서든 잠에 취해서든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숨겨놓은 얘기나 진심어린 헛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으므로. 물론 아무리 정신을 잃더라도 절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도 존재한다. 그러니 취중의 얘기가 진심인지 진상인지 판단하는 건 순전히 개인의 감정에 기인한단 생각도 든다.
필자도 그랬다. 한때 연락하던 연상녀가 필자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실수를 했던 적이 있는데, 그냥 이해하고 넘겼었던 이유는 당시의 호감 때문이었다. 그녀가 바람을 피웠던 건지 단순한 실수였는지는 아직도 풀 수 없는 미스터리지만.
그런데, 진심이 아예 없는 이성을 만나면서 그 진심을 궁금해 하는 안타까운 사람도 많다. 다음 주에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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